<학술> ‘작자 미상’ 아리랑의 발자취를 돌아보다 (한성대신문, 554호)

    • 입력 2020-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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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0-04-05 03:18

민족의 정(情)과 한(恨)이 담긴 아리랑은 우리나라의 대표 민요다. 일반 백성뿐 아니라 양반과 왕족까지 즐겨 불렀을 정도로 다양한 계층의 사랑을 받았다. 우리나라 팔도 곳곳에 전승되는 등 지역적 파급력도 실로 대단했다. 부르는 사람 마음대로 가사를 지을 수 있는 쉬운 구조 덕에 지금까지 알려진 아리랑의 개수는 3,600여 곡에 달할 정도다.

아리랑, 뿌리를 찾아서

아리랑은 입으로 전해져 내려와 그 유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아리랑이 고려 후기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박경수(부산외국어대학교 한국어문화학부) 교수는 “고려 말, 고려 속가로 불린 『청산별곡』에서 아리랑의 옛 노래 형태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 이후부터 조선 전기에 쓰인 가사를 모은 『악장가사』에 수록된 『청산별곡』을 살펴보면, ‘얄리얄리 얄랑성 얄라리얄라’라는 후렴구가 등장한다. 일부 학자들은 국어의 음운 변화와 표기법 변화를 통해 오늘날 아리랑의 후렴인 ‘아리아리’, ‘아라리’ 등으로 바뀌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또한 『청산별곡』은 전체 8연으로, 후렴을 각 연 끝에 붙이고 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선창으로 부르는 사설과 후창으로 부르는 여음이 반복되는 형태는 오늘날 아리랑의 가창 형태와 같으며, 후렴 자체가 아리랑의 후렴과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1790년 조선 후기의 천주교 신자였던 만천 이승훈이 필사한 『만천유고』와 19세기 말에 기록된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도 아리랑을 찾아볼 수 있다. 『만천유고』에 있는 농촌가사 ‘농부사’에서 ‘아로롱 아로롱 어희야’는 지금의 아리랑 후렴과 유사하다. 또한 『매천야록』에는 고종이 동궁을 보수하며 밤마다 광대들을 불러 ‘새로 생긴 사랑의 노래’를 연주하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아리랑 타령’이라고 기록돼 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여기에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아리랑 타령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박 교수는 “1865년 경복궁 중건사업 기간에 전국에서 수많은 일꾼들이 모여들면서 아리랑이 전국적으로 퍼졌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강제노역으로 지친 일꾼들이 ‘차라리 내 귀가 어두워져라. 아무것도 못 들었으면 좋겠다’고 노래한 ‘아이롱’에서 ‘아리랑’이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후 아리랑은 각 지역의 특성에 맞게 변주됐다.

‘다채로운 색’, 3대 아리랑

지역마다 사투리가 다르듯이 아리랑도 그 지역만의 음악적 취향으로 변주됐다. 다양한 아리랑 중 한국의 대표적인 아리랑으로 손꼽히는 것은 세 곡이다. 강원도의 아리랑을 기반으로 다듬어진 ‘정선아리랑’, 전라도의 특성으로 변주된 ‘진도아리랑’, 경상도 풍으로 변주된 ‘밀양아리랑’이 그것이다.

먼저 정선아리랑은 강원도 전역과 경상북도, 충청북도 지역에 전해진 민요로, 세 개의 아리랑 중 분포 지역이 가장 넓다. 최은숙(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정선아리랑은 노동요 ‘논매는 소리’에 기반을 두고 있어 가장 전통성이 짙은 토속소리다. 정선아리랑은 아라리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엮음아라리’라는 특수한 형식을 지닌 노래가 있다”고 설명했다. 엮음이란 랩(Rap)처럼 많은 가사를 빠르게 엮어가는 것을 뜻한다. 엮음아라리는 노랫말이 일반 아라리보다 길어 노래 첫머리에서 중간 정도까지의 부분이 빠른 말투로 사설을 엮어간다.

진도아리랑은 전라도 지역에 전승된 민요다. 김혜정(경인교육대학교 음악교육과) 교수는 “전라도의 ‘산아지타령’이라는 악곡을 토대로 만들어진 아리랑 계열이라는 점이 진도아리랑의 주된 특징”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산아지타령은 남도 민요로 주로 논밭 일을 할 때 부르는 토속민요를 의미한다. 산아지타령의 메기는소리에 아리랑 계열의 받는소리를 조합하고 약간의 남도풍 선율로 바꾸어 놓은 것이 바로 진도아리랑이다.

영화 ‘아리랑’ 주제곡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밀양아리랑은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민요다. 김 교수는 “새로운 악곡으로 거듭났다는 점이 밀양아리랑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중국 만주에서 ‘독립군 아리랑’과 ‘광복군 아리랑’으로, 6·25전쟁에서는 중공군의 ‘파르티잔아리랑’, 80년대는 ‘신밀양아리랑’, ‘통일아리랑’으로 변주됐다. 또한, 오늘날 해군 군악대의 행진곡 ‘아리랑랩소디’와 송창식의 ‘밀양머슴아리랑’도 밀양아리랑에 바탕을 둔다.

이렇듯 아리랑은 시작 시기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지만 고려 시대 이후부터 우리 민족과 늘 함께했다. 또한 지역적으로 꾸준한 발전을 이뤘으며, 그만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새로운 아리랑들이 우리 민족의 정과 한을 표현해 왔다. 김 교수는 “아리랑의 변주가 계속되는 것은 바뀐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도 아리랑은 우리 옆에서 우리 민족의 정서를 나타낼 것이다.

안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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