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기자의 사(史)담> 샘골의 계몽운동가 최용신 (한성대신문, 556호)

    • 입력 2020-05-25 00:00
    • |
    • 수정 2020-05-24 02:31

자료 제공 : 최용신 기념관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는 ‘채영신’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작중 채영신은 참된 지식인으로서 농촌을 위한 끝없는 희생정신을 보여준다. 그런데 채영신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그는 바로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1909~1935)이다.

최용신은 일찍이 교육사업에 종사했던 조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근대교육을 쉽게 접했다. 그는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와 협성여자신학교를 다니며 당대의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28년에는 <조선일보>에 ‘교문에서 농촌으로’ 라는 글을 기고하는 등 농촌계몽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기고문에서 그는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퇴치에 노력해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며 농촌계몽운동 을 독려했다. 이후 1929년 최용신은 YWCA(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에 가입해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1931년, YWCA의 간부였던 황애덕 선생은 그를 현재 경기도 안산시 봉오동에 해당하는 샘골에 농촌지도원 자격으로 파견했다. 샘골에서의 활동은 쉽지 않았다. 주민들이 냉소와 멸시를 보냈기 때문이다. 김형목(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는 “초등교육 보급이 30~40%에 불과한 시대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이 농민들과 뜻을 같이 한다는 것은 사치라고 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을에서 운영하던 강습소를 확대 및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농촌을 위해 농가부업 장려 활동을 하며, 주민들에게 존경과 신망을 얻게 된다.

이후 그는 더 나은 활동을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각기병에 걸려 6개월 만에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 샘골에 돌아온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이전보다 더 활발히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YWCA의 지원이 끊기면서 금전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는 경제적 지원을 받기 위해 1934년 10월 여성잡지 에 ‘농촌의 하소연’이라는 글을 기고했지만 사회의 반응은 싸늘했다. 설상가상 과로와 영양부족으로 최용신은 향년 25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김 연구이사는 “최용신은 당대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행운아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편안함보다 농촌을 생각했기에 그의 삶은 빛이 난다”고 평했다. 도시의 화려한 삶을 버리고 농촌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 그의 희생정신은 늘 푸른 상록수처럼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최성훈 기자

[email protected]



댓글 [ 0 ]
댓글 서비스는 로그인 이후 사용가능합니다.
댓글등록
취소
  • 최신순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