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기자의 사(史)담> 의(義)를 행한 선비 조헌 (한성대신문, 557호)

    • 입력 2020-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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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0-06-13 15:12



1591년 한 선비가 도끼를 앞에 둔 채 임금에게 상소를 받아들일 것을 청했다.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차라리 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치라는 의미의 지부상소(持斧上疏). 왕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건 그는 바로 중봉 조헌(1544~1592)이다.

조헌은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1575년 성균관에 입학하면서 당대의 도학(주자학)자로 성장했다. 그는 ‘올바른 일은 반드시 해야 하고 부당한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반대하고 저항하라’는 도학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일(義)’이라면 무엇이든 행동으로 옮겼다. 대표적으로 그는 자신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생기면바로 상소를 올렸다. 조헌은 명나라에 다녀온 뒤, 출신을 따지지 않는 인재등용과 공·사노비의 양민화를 주장하며 전반적인 사회 개혁을 주장하기도 했다. 김문준(건양대학교 인문융합학부) 교수는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본다. 그리고 평등을 실현시키는 것이 바로 도학”이라며 “조헌은 도학자로서 도학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했다”고 설명했다.

조헌은 일본의 침략으로 전쟁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 판단하고, 전시준비를 해야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여러 차례 올리기도 했다. 그가 올린 상소에는 일본군이 어디로 쳐들어올지, 어느 지역을 방어해야 할지, 각 지역의 방어에는 어느 인물이 적합할지 등 구체적인 분석이 담겨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반영시키기 위해 목숨을 건 지부상소를 행했다.

그러나 조헌의 상소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낙향한 조헌은 굴하지 않고 당시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취했다. 먼저 사람을 모아 전쟁준비를 진행했고, 그 결과 임진왜란 전부터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마쳤다. 임진왜란의 발발 이후 조헌과 그의 의병은 충청도 공략의 중심인 청주성을 수복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에도 그들은 전라도 금산(現 충청북도 금산)에서 일본군과 수차례의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와 그의 의병은 세 차례에 걸친 일본군의 공격을 고군분투해 막아냈으나, 결국 수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모두 전사했다.

조헌은 당대의 도학자로서 도학의 가르침을 성실히 수행하며, 자신의 안위와는 상관없이 옳다고 생각한 일을 행했다. 김 교수는 조헌에 대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기억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행동하는 선비’라는 그의 위명은앞으로도 영원히 남을 것이다.

최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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