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기자와 떠나는 문화여행> 죄의 무게를 다는 사람들 (한성대신문, 567호)

    • 입력 2021-05-10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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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1-05-10 09:10

<편집자주>

요즘 넷플릭스나 왓챠 같은 OTT 서비스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우리는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똑같은 생각을 갖지 않는다. 작품의 온전한 의미는 보는 사람에게 달려있다. 해석은 여러분의 몫이다. 나만의 해석을 찾기 위해, 문화 여행을 떠난다.

누구나 죄를 저지를 수 있다. 그 질이 얼마나 나쁘냐에 따라 법은 우리를 처벌한다. 죄의 크기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단연 판사뿐이다. 만약 일반인에게 죄의 경중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아가 이들이 죄의 유무를 결정할 수 있다면 수사 과정은 어떻게 변화할까? 세 번째 여행지는 평범한 사람이 죄의 크기를 논할 수 있는 세상이다.

신혜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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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원들이 증거품을 확인하고 있는 모습

한 남자가 법정 안으로 들어간다. 단상 정면에 3명의 판사가 보인다. 그 앞 한쪽에는 피고인과 변호인이, 다른 한쪽에는 검사가 마주보고 앉아 있다. 검사석 뒤에는 또 다른 자리가 마련돼 있다. 8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앉아 법정을 내려다본다.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8명의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한다. 이 사람들은 판사의 허락 없이 발언할 수 없다. 한 남자가 조용히 손을 들고 기다린다. 판사가 이 남자에게 종이와 펜을 전달한다. 남자가 무언가를 적는다. 남자가 건넨 종이를 읽은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를 부른다. 재판이 중단된다.

공정한 판결을 위해

죄인을 처벌하는 일이 중요할까,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 일이 중요할까? 누군가 “열 명의 범인을 풀어 주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찬성하겠는가? 영화 <배심원들>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법이 왜 필요하냐는 판사의 물음에 “죄 지은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법이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법은, 동시에 법 앞의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존재한다. 영화 속 인물의 대답에 판사 역시 “법은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처벌하지 못하게 하려고 세운 처벌 기준”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바로 ‘무죄추정의 원칙’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란 피고인 또는 피의자를 유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대한민국헌법』 제27조 제4항에서 그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판사가 유죄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합리적 의심이 없는 증명이 필요하다. 무죄 가능성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대한변호사협회에서 발행한 「민사·형사 재판에서의 입증의 정도에 대한 비교법적·실증적 접근」에 따르면, 무죄 가능성이 없는 재판은 전체의 약 89%다. 이를 제외한 11%는 유죄 증거가 있으면서도 무죄일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이유로 판사는 양형이 결정돼 판결이 끝나기 전까지 피고인을 무죄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법정 내 최고 권력을 가진 판사조차도 사람이기 때문에 오판할 가능성이 있다. ‘화성 연쇄살인 8차사건’의 범인으로 20년간 실형을 살았던 윤성여(54) 씨는 작년 12월이 돼서야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 받았다. 20년이 지나 경찰의 불법 수사와 판결 오류가 인정된 것이다. 그의 20년 세월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실제로 윤 씨는 무죄선고를 받은 후 “1,000억을 준다고 해도 자신의 인생과 바꿀 수 없다”며 착잡한 심정을 밝혔다.

판사는 전적으로 검사와 변호사의 논쟁, 증인의 진술, 증거 등 재판과 관련한 자료 및 법률에 근거해 판결을 내린다. 따라서 올바른 판결을 위해서는 수사기관의 중립적인 수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어떤 경우에도 피고인이나 피의자의 조사는 무죄가 가정된 상태로 진행돼야 하며, 수사 과정에서 검찰과 경찰은 그 원칙을 지켜야 한다. 피고를 유죄로 추정한 채 증거가 수집됐다면 판사는 올바른 판결을 내리기 힘들어진다.

결백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영화 <배심원들>에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자리가 하나 더 등장한다. 판사의 시선에서 오른쪽에 자리한 배심원석이다. 배심원 제도는 국민이 배심원으로 형사재판에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제도(이하 참여재판)다. 만 20세 이상 국민 중 무작위 추첨으로 구성된 배심원은 형사재판에 참여해 사건의 유‧무죄 평결을 내리게 된다. 또 사실의 인정, 법령의 적용 및 형의 양정에 관한 의견제시 권한을 가진다. 배심원이 내린 평결은 판사의 판결과 달리 법적 구속력이 없다. 법제처에 따르면, 배심원은 양형에 관한 의견 개진만 가능하다. 영화 <배심원들>에서도 배심원의 의견은 그저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배심원은 수사 기관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힘을 갖는다. 수사 기록 및 증거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참여재판에서 수사기록 열람 등을 통해 확보한 증거는 배심원의 결정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 제41조 제1항에 따르면, 배심원은 피고인 및 증인의 신문까지 요청할 수 있다.

배심원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일반 국민’이라는 점이다. 참여재판에서 검사는 법적 배경지식이 적은 배심원에게 재판 내용을 보다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 재판부는 배심원이 적절한 평결을 내릴 수 있도록 공판기일 전에 설명서를 작성한다. 검사와 변호사도 배심원을 설득하는 행위에 초점을 둔다. 평의가 법적 효력은 갖지 않더라도 여론 및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검사는 수사 과정 및 증거를 보다 꼼꼼히 검토할 것이고 이는 곧 11%의 무죄 가능성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배심원의 존재는 그렇지 않은 재판보다 수사 과정과 증거에 대한 검토가 더 면밀히 이뤄질 수밖에 없다.

죄의 무게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판사다. 결정의 근거는 수사결과와 검사 및 변호사의 자료다. 억울한 판결을 번복하지 않으려면, 판결 과정 속 모든 주체와 우리들 모두가 무조건적인 처벌 대신 ‘무고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 것’에 더 큰 방점을 찍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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