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뜨거웠던 부산과 마산의 시월 (한성대신문, 571호)

    • 입력 2021-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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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3-04-17 02:13
▲마산역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고 있다. [사진 제공 :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당시 학생들은

감옥은 물론이고

죽을 각오로

시위에 임했다"

“유신철폐! 독재타도!” 지금으로부터 42년 전 부산과 마산에 울려 퍼진 목소리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은 정부에 빼앗긴 민주주의를 되찾고자 시위를 벌였다. 우리는 이 시위를 ‘부마민주항쟁(이하 부마항쟁)’이라 부른다. 당신은 부마항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유신정권에 대한 불만

부마항쟁의 큰 원인은 유신(維新)체제하에서 일어난 시민 억압이다.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선포했다. 유신헌법은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지 못하는 간선제 조항과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긴급조치* 등의 내용을 포함한다. 이후 대학생을 중심으로 유신헌법과 정부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1973년 서울대학교를 시작으로 각 대학교에서 크고 작은 유신헌법 반대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정부는 굴하지 않고 긴급조치를 실시해 강력하게 시위를 진압하는 등 국민의 자유를 탄압했다.

▲YH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1970년대 후반 부산과 마산의 경제 상황이 악화된 것도 부마항쟁의 원인 중 하나다. 부산과 마산은 수출 중심의 노동집약적 산업이 주를 이뤘는데 석유파동으로 인해 수출량이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업이 줄줄이 도산하고 해직자들이 늘어나는 등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더불어 김영삼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직을 제명당한 일도 시위를 촉발시킨 계기가 됐다. 1979년 YH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은 생존권 보장을 외치며 농성을 벌였고 경찰은 강경하게 진압했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은 여성 노동자들의 편에 섰다는 점을 빌미로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에 의해 국회의원에서 제명됐다.

김 전 대통령의 지역구인 부산과 마산의 시민, 특히 학생들은 이 사건에 큰 자극을 받았다. 부마항쟁에 참여한 전도걸(63) 씨는 “당시 YH사건 진압과 김 전 대통령의 의원직 제명 등 정권의 폭압적인 처사로 사회 분위기가 악화됐고, 여기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렇듯 부마항쟁은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했다. 그렇다면 과정은 어땠을까?

▲부산에서 시위대가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닷새간의 항거

1979년 10월 15일, 일부 학생들은 부산대학교에서 시위를 도모했으나 실패로 끝난다. 학생들 간의 모인 시간이 맞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날은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내용의 선언문 2개만 배포됐다.

다음날인 16일부터 본격적인 부마항쟁이 전개된다. 이날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된 학생시위는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다. 그 결과 오후 7시 무렵에는 남포동 부영극장 앞 거리에 5만여 명의 인파가 몰렸고 퇴근하던 회사원, 근처 상인,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등 다양한 계층의 시민이 함께했다. 전 씨는 “16일 부영극장 앞 시위대 속 대학생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날 시위대의 80% 이상이 시민이었다”고 밝혔다.

17일, 전날의 소식을 접한 동아대학교 학생과 시민들이 가담하면서 시위대 인원은 더욱 불어난다. 또다시 부영극장 앞에서 다시 대규모 시위가 시작됐지만, 사전에 시위를 예상하고 배치돼있던 경찰이 개입했다. 그리고 경찰들은 시위대를 강하게 탄압했다. 전 씨는 “경찰이 곤봉으로 시민들을 때리고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발사했다. 종종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부상을 입는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경찰의 무력 진압에 시민들은 경찰서나 파출소를 습격하거나,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과 언론사에 돌을 던지기도 했다.

▲시위대가 휩쓸고 간 파출소가 폐허로 변했다. [사진 제공 :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18일, 정부는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본격적으로 계엄군이 투입되자 시위의 불꽃은 잦아들었다. 시위를 주도했던 대학생들도 몸을 숨기기 바빴다. 시위에 참여한 이동관(67) 씨는 “다니던 대학교는 물론 시내에도 계엄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계엄군을 상대로는 경찰이 진압할 때처럼 시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같은 날, 마산 지역에서도 시위가 시작됐다. 부산의 소식을 접한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에 노동자들을 비롯한 시민들이 힘을 보탰다. 당시 경남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정성기(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는 "마산에는 오랜기간동안 시위가 열리지 않어서 시위 성공에 대한 확신이 없으나 학생과 시민들의 열띈 호응을 얻었다"고 전했다.

19일, 부산에 있던 계엄군의 일부가 마산에 투입된다. 그러자 마산 시민들은 정부의 진압을 피해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이날의 시위대는 새벽까지 활동했고 부마항쟁의 마지막 시위가 됐다.

20일, 마산의 시위 열기가 가라앉지 않자 정부는 마산에 위수령***을 선포한다. 위수령이 선포되면서 마산에 군부대가 자리 잡았다. 군부대는 경찰과 함께 경계를 서며 시민들의 동향을 살폈고, 통행금지 시간을 오후 10시로 앞당겼다. 결국 치열하게 일어났던 시위의 불씨는 되살아나지 못하고 닷새 만에 마무리됐다.

부마항쟁의 흔적

부마항쟁은 비록 직접적으로 유신정권을 무너뜨리지는 못했으나, 유신체제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표현했다. 부마항쟁이 종료되고 후 6일이 지난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하면서 18년간의 유신정권이 막을 내렸다. 홍순권(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및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위원장은 “유신정권이 부마항쟁에 굴복한 건 아니지만, 항쟁으로 인해 정권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의 강력한 진압으로 끝이 난 부마항쟁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을 남겼다. 부마항쟁은 1960년 4·19 혁명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대규모 시민항쟁이었다. 홍 위원장은 “부마항쟁은 이후 5·18 민주화운동과 6·10 민주항쟁에도 영향을 미쳤다”며, “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일궈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디딤돌 역할이 된 운동”이라고 설명했다.

* 긴급조치 : 국가 비상 상황 시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국민의 자유나 권리의 일부를 제한하거나 정부, 국회, 법원의 활동을 제한할 수 있는 조치

** 유신정우회 :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의 추천으로 선출된 전국구 국회의원들이 구성한 원내교섭단체

*** 위수령 : 군부대가 한 지역에 주둔하면서 그 지역의 경비, 군대의 질서 및 군기 감시와 시설물을 보호하는 조치

김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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