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나친 순간들> 대한민국 민주화를 피어낸 진정한 불씨 (한성대신문, 575호)

    • 입력 2022-03-07 00:00
    • |
    • 수정 2022-03-06 22:41

<편집자주>

우리가 미처 모르고 지나친, 혹은 무관심 속 잊혀지고 있는 역사는 없을까. 백암 박은식 선생은 나라는 잃었을지언정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며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라 말했다. 우리가 지나친 역사적 사건을 찾아 잊힌 우리의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자.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정부 수립 이후로 꾸준히 이어져 왔다.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등 많은 이들의 희생을 통해 지금의 민주주의가 얻어졌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민주화 포문을 연 사건은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민주주의를 찾기 위해 첫걸음을 내디딘 1960년 2월 28일 대구로 가보자.

김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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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를 위해 모인 학생들이 경북 도청 광장을 가득 매웠다. [사진 제공 :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사회를 위해

민주주의가

성장해야 함을

처음 깨달았다"



민주화의 문을 연 학생들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련다.” 1960년 2월 28일 일요일, 경북고등학교 조회단에 올라간 두 학생이 대표로 결의문을 외쳤다. 결의문 낭독이 끝나자 운동장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일제히 학교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이 운동장에 모이게 된 이유는 3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월 25일을 기점으로 대구 8개 공립고등학교 학생들에게는 28일 일요일에 등교하라는 소식이 전달됐다. 3월 15일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를 앞두고 28일 진행될 예정이던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의 선거유세에 학생들의 참여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소식을 들은 학생들은 ‘민주당 유세에 가지 못하게 막는 것 아니냐’ 며 교사들에게 반발했다. 김태일(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무소속 조봉암 후보에 게 가장 높은 지지를 보일 만큼 대구는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었다”며 “이승만 정부는 민주당의 유세를 방해하며 자유당의 선거 운동만 지원했다”고 말했다.

일요일 등교를 두고 지속해서 학생들 간에 말이 오가자, 경북고등학교를 비롯한 3개 학교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계획했다. 시위에 참여했던 홍종흠(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원로자문위원은 “교실에서 일요일에 등교를 하느냐 마느냐로 이야기하다가 시위를 나서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27일 오후 6시경, 경북고등학교, 대구고등학교,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모였다. 이들은 오후 11시까지 논의 한 끝에 결의문을 작성했고 28일 오후 28일 오후 1시에 일제히 시위하기로 합의했다.

▲경북고등학교 운동장 조회단에서 학생 대표자가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 제공 :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다음날 경북고등학교에서 2·28민주운동이 처음으로 시작됐다.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은 조회단에서 결의문을 읽는 학생에 큰 호응을 보냈다. 비슷한 시간 대구고등학교에서도 시위가 시작됐고, 이후 산발적으로 시위가 이뤄졌다. 이들은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일요등교의 폐습을 시정하라!’ 등의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며 도청과 언론사로 향했다. 홍 원로자문위원은 “기성세대가 시위에 나섰다가는 가정이 멸문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기성세대를 대신해 우리들이 목숨 바쳐서 시위를 해보자고 결심했다”며 당시를 회상 했다. 김태일 교수는 “이승만 정권의 억압에 모두 주눅이 들어 침묵하고 있던 상황에서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난 학생들의 저항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출동한 경찰이 시위하던 학생을 연행 중이다. [사진 제공 :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그러나 시위는 크게 확산되지 못하고 경찰 진압에 의해 마무리됐다. 경찰도 처음에는 시위를 관제데모*로 이해하고 길을 비켜주기도 했지만, 얼마 뒤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는 시위임을 파악하고는 학생들을 강하게 진압했다. 이승만 정부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견 표출을 제한했다. 정부에 대한 허위사실로 규정해 처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구 지역의 8개 공립고등학교에서 반나절 간 일어난 이 시위에서는 220여 명의 학생이 체포됐다. 경찰 당국은 성난 민심을 고려해 대부분의 학생들을 당일 저녁에 풀어줬다. 다음날 오전, 학생들을 풀어달라는 시위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학생들이 모두 풀려난 것을 보고 해산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국회를 통과한 개헌안에 서명했다. [사진 제공 :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학생들의 이승만 정권을 향한 불만 때문이었다. 비단 일요등교에 반발해 벌어진 시위라고 볼 수 없다. 김일수(경운대학교 교양교육학부) 교수는 “1950년대 한국의 정치 사회 구조가 근원적으로는 2·28민주운동이 발생할 수 있는 배경이자 이유”라고 말했다. 이어 백승대(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부회장은 “이승만 정권의 반민주적 폭거와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가 2·28민주운동을 낳게 한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전국적으로도 정치·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이승만 정부에 대한 민심은 나빠진 상황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자유당과 함께 2번의 개헌을 진행해 임기를 연장했다. 1950년 말에는 세계적 불황, 이승만 정부와 미국의 갈등으로 미국에게 받던 원조가 감소했다. 이는 경제성장률 감소, 실업자 증가로 이어져 한국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최병택(공주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실업률이 치솟은 탓에 학생들은 미래를 걱정해야 했고, 기성세대는 당장 오늘 하루 먹을 식량을 걱정해야 하는 처참한 상태였다”고 전했다.

▲대구 시민들이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의 선거 연설을 듣고 있다. [사진 제공 :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1960년에 진행된 ‘제4대 대통령선거’, ‘제5대 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서거하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단독 후보가 되며 당선은 확실시된 상황이었다. 다만 고령이었던 이 전 대통령의 혹시 모를 사망에 대비해 자유당은 부통령선거에 심혈을 기울였다. 부통령의 대통령 승계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와 '제4대 부통 선거' 결과 대구 지역에서 민주당에게 패배했던 자유당은 선거에서 많은 표를 얻기 위해 부정행위를 계획했다. 그 결과 자유당 경북도당은 본인들의 유세가 있는 27일에 학교와 직장 등을 일찍 끝내고 유세에 참가하도록 명령했다. 반면 28일에는 학생들이 민주당의 유세에 가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김일수 교수는 “당시 국가 권력이 학교와 학생을 정치적 지지의 동원으로 간주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고등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높은 관심도 한몫했다. 사회 상황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대구 학생들은 당시 유행하던 ‘유정천리’라는 노래를 급서한 민주당 조병옥 후보를 추모하는 내용으로 바꿔 부르다가 경찰에 끌려간 경우도 있었다. 또한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과 달랐던 민주주의와 현실은 학생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오제연(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당시 고등학생들은 사회를 이끌어나갈 엘리트였다”며 “이승만 정권은 학생들이 교과서에서 배운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시간이 갈수록 정권에 대한 비판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작은 움직임이 만든 변화

하루 만에 끝난 고등학생들의 짧은 시위였지만, 역사에 미친 파장은 컸다. 언론정책 7개항, 2·4정치파동** 등 이승만 정권의 언론탄압으로 반정부적인 보도를 하지 않던 언론들이 움직였다. 시위 과정에서 학생들이 언론사들에게 시위 보도를 촉구했기 때문이다. 결국 시위 소식은 대구 지역 신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최 교수는 “사건이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됨에 따라 학생들은 비로소 용기를 내 저항의 뜻을 표출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2·28민주운동 직후 3·8민주의거***와 3·15부정선거 당일 마산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2·28민주운동은 민주화에 향한 시민들의 열망을 일깨웠고 결국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까지 이어지게 된다. 김일수 교수는 “2·28민주운동은 4·19혁명의 도화선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고 전했다.

오늘날 2·28민주운동은 대한민국 현대사 속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으로 여겨진다. 반민주적인 사태에 항거한 첫 시위였으며 나아가 다른 민주화운동으로 연결됐다는 이유에서다. 2018년에는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기도 했다. 김태일 교수는 “뒤늦게 민주화가 진전되고 민주주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소중하게 다루어지는 시절이 와서 비로소 2·28민주운동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며 “정권에 의해 동원된 데모는 있었지만 민주적으로 일어난 저항시위는 2·28민주운동이 첫 번째였다”고 말했다. 백 부회장은 “해방 이후 반정부시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한 민주주의적 가치를 훼손한 반민주적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집단적 움직임은 2·28민주운동이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2·28민주운동이 조직적이지 못하고 장기적인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던 한계를 가진다고 말한다. 일부 학도 호국단 간부들이 모여 시위를 계획했지만, 당일에는 8개 고등학교의 시위가 산발적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지향하는지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도 존재한다. 최 교수는 ”학생들이 단순히 어느 특정한 정치 세력을 지지하기 위해 민주운동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라며 “민주화를 위한 보다 장기적인 전망을 제시하는 단계에 이르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진실로 순수한 정의감에서 시위에 참여했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전했다.

2·28민주운동이 우리에게 보여준 정신은 무엇일까. 홍 원로자문위원은 “민주주의를 선구했던 과거의 교훈을 되살려서 나라를 독재 권력에 뺏기고 국민 주권이 짓밟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며 “언제나 2·28 민주운동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오 교수는 “과거보다 학 생들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성장시켜야 할 책임이 커졌다. 2·28민주운동은 이러한 책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역사적 전범” 이라고 평가했다.

*관제데모 : 중앙기관이나 지자체 등 공공기관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벌이는 시위

**2·4정치파동 : 자유당이 야당의원들을 폭력으로 몰아내고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여러 법안을 통과시킨 정치사건. 이를 통해 언론이 정부 정책을 비판하거나 시민이 자유롭게 의견을 표출하는 것을 막았다.

***3·8민주의거 : 3월 8일부터 10일까지 대전에서 고등학생들의 주도로 이승만 정권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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