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정> 올레길에서 만난 것들 (한성대신문, 575호)

    • 입력 2022-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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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2-03-06 22:31

지난겨울 틈날 때마다 제주에 다녀왔다. 좀처럼 영하로는 떨어지지 않는 제주의 온화한 날씨와 아름다운 풍광이 자꾸만 나를 유혹했다. 자동차를 빌려서 주요명소를 점찍듯이 다녔던 예전과는 달리 제주의 구석구석을 매일매일 걸어서 다녔다. 바다길, 산길, 마을길, 도심길이 두루 이어진 올레길 코스를 그렇게 두 발로 누비고 다녔다. 용수포구에서 시작해서 성산일출봉까지 꽤나 긴 거리를 온전히 내 신체의 힘만으로 주파했다. 문득 뒤돌아보면 저렇게 먼 거리를 지나왔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고, 대단한 뭐라도 해낸 것 같은 묘한 성취감이 나를 달뜨게 했다.

느리게 한 걸음 한 걸음 걷다보니,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겨울 들판에도 이름 모를 꽃들이 무수히 피어 있고, 밭에 심어 놓은 작물들이 양배추, 당근, 무 이렇게 지역마다 달라진다는 점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 중요할 것 없는 사소한 발견이었지만 내심 뿌듯했다.

이런 사소한 발견은 길 위에서 어김 없이 되풀이 되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길 그 자체에 있었다. 올레길을 이끌어주는 리본을 따라서 걷다보니 또 다른 빛깔의 리본들이 함께 눈에 띄었다. ‘절로 가는 길’, ‘천주교 순례길’ ‘제주 4·3길’을 알리는 리본들이 길 위에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내가 걷던 길이 비단 올레길만이 아니었고, 사찰로, 성지로, 아픈 역사 속으로 나를 안내하는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인생을 흔히 길에 비유하곤 한다. 인생의 길은 올레길처럼 정해진 코스를 무작정 따라서 걷기만 하면 충분한 길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앞에 펼쳐진 길을 충실하게 따라서 걷다 보면 어느새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도 있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기착지에 도달하기도 한다는 점에서는 올레길과도 많이 닮아 있다.

다시 봄이 오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이번 학기 걷게 될 길이 과연 우리를 어느 곳으로 이끌어 줄 것인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한 걸음 한 걸음 차곡차곡 내딛다보면 지금과는 다른 어느 지점에 도달하게 될 것임에는 틀림 이 없다. 그곳이 당초 우리가 꿈꾸던 곳일 수도 있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다른 곳일 수도 있겠지만, 무슨 상관이랴. 그 길 위에서 만난 모든 것들이 몸 깊이 각인되어, 그곳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다시 함께 길을 나설 시간이다.

이호신(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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