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자가 보내는 신화로의 초대장> 선화공주는 정말로 서동과 혼인했을까? (한성대신문, 584호)

    • 입력 2022-12-0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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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2-12-05 00:01

예로부터 우리 사회에서 허위사실 유포는 상당히 도덕적 지탄을 받는 행위였다. 다만 우리 설화 속에서는 이를 영리하게 이용하는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선화공주와 서동의 이야기다. 서동은 사랑하는 공주와 혼인하기 위해 선화공주가 자신을 좋아한다며 헛소문을 퍼뜨렸고, 이와 관련한 노래가 현재까지도 문학작품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바로 「서동요」다.

“선화공주님은 / 남몰래 사귀어두고 / 서동방을 /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서동요」에 대한 국문학자 양주동의 해석이다. 「서동요」는 한자의 뜻과 소리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향찰’ 기법으로 쓰인 향가 문학의 한 종류이기에, 기록된 한자의 뜻이 아니라 우리말로 해석해 봐야 한다. 학자마다 그 해석이 대동소이하지만, 선화공주가 서동(薯童)과 몰래 사랑한다는 것이 「서동요」의 주요 내용이라는 점에서는 큰 이견이 없는 편이다. ‘서동’은 마를 캐어 내다 파는 아이를 일컫는다. 「서동요」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에는, 「서동요」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설화도 함께 기록돼 있다. 배경설화에 따르면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며, 서동은 훗날 백제의 30대 왕인 무왕이 된다.

『삼국유사』에는 서동의 어머니는 과부인데, 용과 통정해 서동을 낳았다고 기록돼 있다. 서동이 태어난 곳은 ‘서울 남쪽’으로, 당대 백제의 수도 사비 남쪽으로 볼 수도 있고, 학자에 따라 전라북도 익산시로 추측하기도 한다. 마를 캐어 내다 팔며 생계를 유지하던 서동은 신라의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의 수도로 떠난다. 서동은 신라의 수도에서도 아이들에게 마를 파는데, 자신에게 마를 사 먹는 동네 아이들에게 선화공주가 밤마다 서동과 몰래 만난다는 내용의 「서동요」를 부르고 다니게 한다. 「서동요」로 인해 퍼진 헛소문을 전해 들은 신라의 신하들은 왕에게 외간 남자와 함부로 만난 공주를 귀양 보내라고 청한다. 결국 귀양을 떠난 선화공주는 귀양길에서 서동을 만나고, 우연히 만난 그와 사랑하게 된다. 이후 서동은 그간 모아놓은 금덩이들을 진평왕에게 바치는 등 노력을 기울여 사위로서 인정받고, 백제의 왕이 되는 데에도 성공한다. 이어지는 내용은 ‘미륵사’의 창건과 연관되는 부분으로, 왕비가 된 선화공주가 무왕에게 절을 창건하게 해달라고 청을 하니, 그 절이 전북 익산에 자리한 미륵사라는 것이다. 미륵사는 현재 절터와 석탑만 남아있다.

이러한 이야기 때문에 무왕과 선화공주가 부부라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져 있었다. 그러나 2009년, 미륵사지 서석탑에서 ‘금제사리봉영기(이하 사리봉영기)’가 발견된 이후, 선화공주가 정말 무왕의 부인이 맞는지에 대한 학계의 논쟁이 뜨거워졌다. 사리봉영기는 미륵사 창건 당시 백제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며 금판에 글을 쓴 유물이다. 그곳에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적혀 있어, 무왕의 부인의 정체에 관한 논의가 이뤄지게 된 것이다. 좌평은 백제의 고위 관직으로, 흔히 ‘사택왕후’로 불리는 사택적덕의 딸이 무왕의 부인이 맞다면, 그는 왕족이 아닌 귀족 출신 왕비로 볼 수 있다.

설화와 상반된 정보를 기록한 사리봉영기가 발견된 이후 무왕의 부인에 대한 여러가지 가설이 등장했고, 그 중 사리봉영기를 근거로 사택왕후만을 무왕의 부인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장웅(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주무관은 “사리봉영기는 백제 당대의 기록이며, 선화공주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설화의 주인공”이라며 “사택왕후만을 무왕의 부인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지적했다.

또 선화공주를 부정하는 학자들은 당대 신라와 백제의 관계를 근거로 든다. 국내외 다수 역사서를 종합해 보면, 무왕이 신라를 먼저 공격한 일이 11번이며 신라가 먼저 백제를 공격한 일이 2번 있었다. 양국 간에 전쟁이 잦았기 때문에, 두 나라가 사돈을 맺는 일은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기섭(경기도박물관) 관장은 “무왕은 즉위 2년 만에 신라를 공격했다”며 “7세기의 정세를 고려하면 두 왕실 간 혼인이 성립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양국이 전쟁을 벌였음에도 사돈을 맺은 전력이 있다고 반박하면서 선화공주가 무왕의 부인이었을 가능성에 힘을 싣는다. 실제로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의 동북쪽 지역을 빼앗은 후에도, 백제의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 보낸 전례가 있다. 이와 관련해 노중국(계명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는 “무왕은 왕권 강화와 고구려에 대항해야 한다는 과제가 있었고,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며 “화친이 필요했던 양국은 국혼을 추진했고, 이를 재미있게 엮어낸 결과물이 서동 설화”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들은 무왕의 부인이 여러 명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사리봉영기에 따르면 사택왕후가 무왕의 부인인 것은 확실하지만, 일부다처제 등의 여러 가능성을 열어 둔다면 두 여인 모두 부인이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 고대사에서는 왕이 후궁과 별개로 왕비를 여럿 들인 일이 많다. 김병남(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고구려 유리왕, 대무신왕 등이 2명 이상의 비를 뒀으며, 무왕 또한 여러 왕비를 거느렸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다양한 가설이 거론되는 가운데, 선화공주가 백제 왕후였을 가능성을 지지하는 역사가들은 그 시기의 나-제간 정세를 언급하기도 한다. 설화 속 혼인을 통해 두 나라가 화해했는지, 심각한 경쟁을 빚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노 교수는 “왕실 간 행해지는 정략적 결혼은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됐을 때 더 많이 나타난다”며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은 양국의 화평 관계가 시작되는 605년 전후로 이뤄졌을 것으로 보이며, 이후 6~7년간 전쟁도 소강 상태였다”고 분석했다.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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