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뒤집은 그날> 창문 앞에서 전쟁터까지 : 유럽 종교전쟁의 흐름 (한성대신문, 586호)

    • 입력 2023-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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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3-03-06 17:43

언제나 큰일은 작은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비의 날갯짓이 일으킨 바람이 지구의 다른 어딘가에서 폭풍을 일으킨다는, ‘나비 효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는 세계사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 교과서 한 페이지를 빼곡히 채울 만한 큰 사건이 촉발된 것도 교과서 가장자리에 손톱만 한 글씨로 설명돼 있는 작은 사건이 도화선으로 작용했기에 가능했다.

약 400년 전에 누군가를 창밖으로 던져버린 사건이 한 제국을 거대한 전쟁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일만 봐도 알 수 있다. 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제2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 그 사건이 낳은 ‘30년 전쟁’ 속으로 들어가 보자.

두 사건을 파악하려면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6세기 유럽에는 종교개혁의 바람이 몰아닥치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교회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재하고, 당대 로마 가톨릭의 면벌부* 판매를 비판하고 나서며 시작됐다. 1536년에는 장 칼뱅이 『기독교 강요』라는 책을 편찬하며 로마가톨릭의 개혁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에 루터를 따르는 ‘루터파’, 칼뱅을 지지하는 ‘칼뱅파’가 나타났고, 이들이 만든 새로운 기독교를 ‘개신교’라 부른다.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은 대립하기 시작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교황의 권위를 재확인하며 자신들이 ‘정통파’임을 강조했고, 루터파와 칼뱅파를 포함한 신교 세력은 로마 가톨릭의 탄압에 맞섰다.

그러다 1555년, 구교와 신교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맺어졌다. ‘화의(和議)’는 화해를 위한 의논을 말한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이해하려면, 현재의 독일 지역에 위치했던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신성 로마 제국은 여러 개의 제후국과 도시로 이뤄진 국가였다. 제후는 신성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고 제국에 소속돼 있는 대신, 황제에게 땅을 하사받는다. 제후는 하사받은 땅인 ‘영지’ 내 백성에 대한 지배권을 가졌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에는 7명의 선제후가 있었는데, 이들은 신성 로마 황제에 대한 선출 권한을 가졌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당시의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와 제국 내 신교 세력을 구성하는 제후들 간에 맺어진 강화다. 이 화의의 핵심은 ‘제후가 믿는 종교가 곧 영지 전체의 종교’라는 원칙이다. 화의 내용은 백성이 제후의 종교가 싫다면 다른 지역으로 떠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포함했다. 다만 이 화의에 참가한 제후들은 모두 루터파를 선택했고, 단 한 사람의 제후도 칼뱅파를 택하지 않았기에 루터파만이 기독교의 공식 교파로 인정받게 됐다. 칼뱅파는 여전히 로마 가톨릭 세력의 탄압을 받을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던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주요한 제후국이었던 ‘보헤미아 왕국’에서도 신교에 대한 탄압이 벌어졌다. 보헤미아는 루터의 등장 이전부터 로마 가톨릭의 개혁을 외치다 화형당한 얀 후스의 전통이 있던 곳이었고, 그렇기에 보헤미아 귀족들은 칼뱅파를 포함한 다양한 신교를 수용했다. 1526년부터 이곳을 다스리기 시작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통치 시작 시기부터 ‘재가톨릭화 정책’을 펼쳤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로마 가톨릭을 신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세 번째 보헤미아 왕이 된 루돌프 2세는 보헤미아 귀족들과의 충돌을 우려해 ‘종교 자유에 대한 칙서’를 반포했다. 황대현(목원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는 “해당 칙서에는 보헤미아인들의 자유로운 예배 허용, 특정 지역 내 개신교 교회 설립 허용 등 ‘신교를 믿을 자유’가 규정됐다”고 내용을 설명했다.

그러나 루돌프 2세의 뒤를 이은 마티아시 2세와 페르디난트 2세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특히 로마 가톨릭 소속의 수도회인 ‘예수회’의 학교에서 교육 받으며 자라난 페르디난트 2세는 이전보다도 강력한 신교 탄압을 일삼았다. 개신교 교회를 폐쇄하거나 파괴하고, 개혁교회 지도자를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황 교수는 “페르디난트 2세의 탄압에 대처하기 위해 보헤미아 귀족들이 모임을 가졌으나, 페르디난트 2세는 이러한 모임마저도 금지시켰다”고 말했다.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무자비한 탄압에 결국 프라하의 왕궁, ‘흐라드신 궁’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루돌프 2세가 반포한 종교 자유에 대한 칙서의 엄격한 시행을 요구했다. 페르디난트 2세 본인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영지인 오스트리아 빈의 ‘호프부르크 궁’에 머무르고 있었기에, 흐라드신 궁에는 페르디난트 2세 대신 그의 섭정관과 서기관이 있었다. 섭정관은 귀족들의 요구를 묵살했고, 화가 난 귀족들은 결국 섭정관과 서기관 등 3명을 궁 창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이것이 1618년의 ‘제2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다. 20m 높이에서 떨어진 세 사람은 크게 다쳤지만, 목숨은 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합스부르크 가문과 신교 세력은 전쟁을 시작했다. 프라하에서의 사건이 길고도 지리한 ‘30년 전쟁’의 직접적 요인이 된 것이다. 4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는 30년 전쟁의 첫 번째 시기는 ‘보헤미아-팔츠 전쟁’이다. 이미 전쟁이 벌어진 와중인 1619년에는 페르디난트 2세가 신성 로마 황제로도 선출된다. 같은 해 겨울에는 보헤미아 귀족들에 의해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위에서 쫓겨나고, 프리드리히 5세가 새 왕으로 즉위한다. 프리드리히 5세는 제국 내 다른 제후국인 ‘팔츠 선제후국’의 선제후였으며, 팔츠 선제후국은 칼뱅파가 다수인 곳이었다. 왕국에서 자신의 지위를 보다 확고히 하고자 했던 프리드리히 5세는 보헤미아-팔츠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디난트 2세의 황제군과 싸웠으나, 빌라 호라 전투 등에서 패배한다. 이 전쟁 이후 프리드리히 5세는 왕위직과 선제후직을 모두 박탈당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하며, 페르디난트 2세가 다시 보헤미아의 왕을 겸직한다. 황 교수는 “신성 로마 제국 내 개신교 세력의 군사 동맹체인 ‘개신교 연합’의 수장이 프리드리히 5세였기 때문에, 보헤미아인들은 그를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프리드리히 5세는 1619~1620년의 겨울 동안만 보헤미아 왕을 지냈기에 ‘겨울왕’으로 조롱당했다”고 덧붙였다.

이후 이웃나라인 덴마크가 제국 내 신교 세력을 돕기 위해 전쟁에 가세한다. 그러나 덴마크 역시 황제군에 패하게 되고, 이 시기를 ‘덴마크 전쟁’이라고 일컫는다. 로마 가톨릭 세력의 승리였다.

세 번째 시기인 ‘스웨덴 전쟁’부터는 종교적 열정과 더불어 정치적 입지 또한 전쟁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페르디난트 2세는 제국 내의 ‘말 안 듣는’ 제후국뿐 아니라 이웃나라까지 찍어 누름으로써,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국을 독점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자 그는 유럽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욕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독일, 덴마크, 스웨덴 등 많은 국가가 면하고 있는 발트 해에 함대를 만들 계획을 발표하는 등 대외적 팽창을 표방했다. 이에 맞서 합스부르크 가문,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이 유럽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일은 보고 싶지 않았던 주변국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프랑스로부터 군비 지원을 받은 스웨덴이 먼저 제국을 공격했고,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전사한 이후 스웨덴과 신교 세력의 전력이 급격히 감소했고, 최종적으로는 황제군에 패배했다.

1635년에는 프랑스가 참전하며, 30년 전쟁의 마지막 시기인 ‘프랑스 전쟁’이 벌어졌다. 군비 지원 등 물밑에서 신교 세력을 돕던 프랑스가 직접 나선 것이다.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가문처럼 로마 가톨릭을 신봉하는 국가임에도, ‘신성 로마 제국의 패권 장악 저지’라는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에 맞서 싸웠다. 교파를 초월한 군사동맹의 현실화였다. 프랑스는 참전 초기에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다, 1640년대에 이르러 승전을 거두기 시작했다. 결국 열세를 띠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을 마무리한다.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칼뱅파도 기독교의 공식 교파로 인정받았고, 제후가 자신의 영지 내 백성에게 종교를 강요할 수 없게 됐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들은 제국에 적대적이지 않은 선에서 독자적인 외교권, 조약 체결권 등을 행사할 수 있는 등의 변화가 이끌어졌다. 황 교수는 “과거에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계기로 국제관계에서 주권원칙이 확립되고 근대적 주권국가가 등장했다는 것이 정설로 통용됐었다”면서도 “제국에 적대적이지 않은 한에서만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은 상당한 제약이기에, 베스트팔렌 조약을 주권국가의 태동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고 최근의 흐름을 설명했다.

특정 지역에서 벌어진 종교 갈등이 유럽 세계에 영향을 미친 전쟁으로 확대된 과정이 눈앞에 그려지는가? 이렇듯 하나의 작은 일은 거대한 사건을 낳는다. 과거 없는 현재는 없고, 현재 없는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사가들은 이 시기 종교 갈등의 양상을 파악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건 간의 흐름을 주목하며 종교전쟁이 그 다음 시대의 유럽에 미친 영향, 그로 인해 일어난 또다른 역사적 사실 등에 주목한다. 안상준(국립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종교전쟁 중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보다는, 종교전쟁이 유럽 사회의 근대화에 미친 영향에 주목한다”며 “종교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에서 유럽인들은 갈등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했고, 이후의 유럽 사회는 법적·외교적 해결 방안을 발달시키며 근대화에 다가섰다”고 전했다.

*면벌부 : 가톨릭 교회가 신자에게 벌을 사면해 주었음을 증명하는 문서. 중세 말 유럽에서 금전적 목적으로 남용돼 비판받음.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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