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라 안진나 대표
등굣길이 공사 구역으로 변모한 지 벌써 3년. 삼선동 일대에서 진행되는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본교를 둘러싸던 오밀조밀한 주택과 추억의 공간들이 사라졌다. 도시를 살아가며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재개발, 어딜가나 비슷한 모양새로 변하는 지금의 획일적인 방식만이 해답일까.
그래서 도시에 대해, 그리고 재개발에 대해 경고장을 날리는 사람을 찾아갔다. 터에 무늬를 일궈내는 ‘터무니 있는 도시’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내세운 ‘훌라(HOOLA)’의 안진나(38) 대표다.
‘훌라’는 인문학적 시선으로 문화 활동을 펼치는 인문예술팀이자 지역의 폐자원을 활용해 악기를 제작하고 또 연주하는 업사이클(Up-cycle) 밴드다. 그가 그려나가는 미래의 도시는 어떤 모습이길래 이런 활동을 하고 있을까. 그가 꿈꾸는 도시 속으로 들어가보자.
도시에 빠지다
안 대표가 도시와 재개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대학 시절의 한 수업이었다. 일상에서 우리가 지나쳤던 공간의 가치를 재생산·재해석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도시에 의미를 부여하게 했다. 일례로 오래된 한옥과 근대 건축물이 펼쳐진 골목들을 방문해 그곳의 역사 등 이야기를 들으며 기존의 인식이 바뀌는 경험을 한 것이다. 단순히 지리적으로 알고만 있던 장소가 의미 있는 공간으로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수업은 강의실 밖으로 나가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방식으로 진행됐어요. 각각의 장소가 지닌 고유한 특성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듣고 나니, 내가 있는 공간이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온 새로운 세계처럼 느껴졌어요. 그때를 기점으로 도시 속 공간들을 유심히 살피게 됐죠.”
그는 강의를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현지 조사를 나가며 직접 발로 뛰었다. 안 대표가 대학에 재학 중이던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탐구 대상은 주로 시골이었는데, 전통의 가치를 중시해 사라져가는 공간을 조금이나마 보존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탐구 대상이 시골로 치우쳐 있는 현상을 바라보며 그는 의문을 품었다. 그의 일상은 시골이 아닌 도시 속에 있었으니 말이다. 학교 담벼락 너머 곧장 보이는 ‘내가 사는 이 공간’도 조사해 보고자 하는 열망을 품기 시작한 순간이다. 그는 도시가 더 궁금해졌다.
경북대학교 학부 전공인 고고인류학과 영어영문학의 수업이 아닌 강의에서 상술한 경험을 해낸 안 대표는 도시 속 공간을 연구해 보고자 동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는 도시인류학과 석사과정을 지내며 시간과공간연구소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 대구광역시에 위치한 시간과공간연구소는 대구 전역 일대의 역사를 연구하는 곳이다. 구체적으로 지금은 사라진 일제강점기 당시의 터를 연구하거나 과거 지도를 고증하는 등, 다양한 업무를 통해 도심 재창조 모델 건설을 목표로 한다.
“연구실에 앉아서 하는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았어요. 어린 시절부터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것을 워낙 좋아했던 터라 학교 안 공부 외의 것들에 갈증을 느꼈어요. 그래서 석사과정 도중에 시간과공간연구소에 입사했어요. 일을 하면서 석사과정을 수료했죠.”
시간과공간연구소에서 그는 대구의 북성로 관련 연구에 매진했다. 북성로 역사의 뼈대에 살을 더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북성로는 당시 주로 ‘공구 골목’의 역할로만 기능해 점차 사람의 발길이 끊기고 있었다. 그는 파편적으로 기능하며 필요에 따라서만 이용되는 도시가 아닌 ‘살아있는’ 도시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기에 단순한 산책으로 도시를 살피는 것부터 시작해 이후에는 도시를 본뜨는 지도를 제작하고, 지역 내 사람들을 만나며 삶의 모양새를 탐구했다.
“북성로에 대한 기초적인 조사를 시행할뿐 아니라 인류학적인 시각으로 도시를 바라봤어요. 북성로를 개척한 사람들을 전수조사해 심층 인터뷰를 하거나, 지역 내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탐구하는 것 등이 예시가 되겠네요.이런 연구를 통해 도시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등을 알아보고자 했어요. 결국 끈질기게 북성로를 연구해 더 많은 사람이 북성로를 찾을 수 있게 만들었죠. 책을 제작하기도, 공모전을 진행하기도, 전시를 기획하기도 하면서 구현해낸 결과였어요.”
한 걸음 더, 훌라
그가 대표가 된 계기도 바로 이 활동 속에 있다. 시간과공간연구소에서의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며 만난 청년들과 업사이클 밴드 훌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업사이클 밴드는 폐자원을 사용해 악기를 만들고 연주하는 밴드이며, 훌라는 그들과 즐기던 카드 게임의 이름에서 차용한 명칭이다. 이들은 현재까지도 공연하고, 뮤직비디오를 스스로 제작한 경험도 있다.
“카드 게임을 하던 구성원 중 폐자원을 재활용해 악기를 만드는 공모전에서 수상한 친구로부터 훌라가 업사이클 밴드로 기능하기 시작했어요. 한 친구가 공모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그 악기가 아까웠던 구성원들이 연주를 해보자고 마음을 모은 거죠. 이게 업사이클 밴드의 시작이었어요.”
안 대표는 훌라 활동을 이어 나가면서 업사이클 밴드의 의미를 재해석했다. 그는 일단 도시의 흥망성쇠라는 하나의 사이클이 존재한다고 판단하고, 이런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면 작금의 도시 사이클은 그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고 분석한다. 그래서 사회적 업사이클 개념을 제시하는데, 기존의 도시를 무작정 무너뜨리지 않고 재해석해 오히려 그것을 자양분 삼는 방식이다. 그는 사회적 업사이클을 통해 결국 인간의 삶이 다채롭게 구성되고, 우리가 연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훌라는 물리적으로 악기를 만드는 업사이클 밴드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업사이클을 실현하는 단체라는 것이 안 대표의 전언이다.
그가 시간과공간연구소로부터 독립하면서 훌라의 몸집은 점점 커져 나갔다. 도시에 대한 역사적 고증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다양한 경험과 체험을 선사해 주고 싶었던 안 대표는 10여 년간 몸담았던 시간과공간연구소를 그만뒀다. 훌라가 현재 지역민의 생활사와 생활양식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면서도 예술 중심의 작업을 진행하는 인문예술팀으로 발전한 계기다.
“일을 하면서 한 선배가 젊은 청년끼리 더 자유롭고 재밌는 방식으로 도시를 위해 고민해 보라는 조언을 했어요. 오래 일했으니 자연스럽게 독립할 시기라고 여겨지기도 했지만, 충고도 영향을 끼쳤죠. 나이가 비슷해 제약 없이 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훌라의 장점이 크게 다가왔으니 말이에요. 독립하면서는 더 많은 청년을 만날 기대감에 부풀었어요. 이는 훌라와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우리가 사는 도시가 더 좋아지겠다는 희망으로 이어졌죠.”
훌라는 이렇게 업사이클 밴드에서 출발해 도시 속 연구와 활동을 진행하는 인문예술팀으로 성장했다. 현재는 도시 아카이빙* 사업 등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이는 대구에 한정되지 않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이어진다. 도시 아카이빙은 재개발로 사라지는 도시를 보호하고 더 나은 개발로 나아가기 위해 시행된다. 구체적으로는 도시의 역사와 같은 인문학적인 지리 정보가 포함된 지도를 만들고, 이를 위해 그림이나 항공사진 등의 비문자로 지도를 제작하기도 한다. 아카이빙을 통해 지역을 알아야 그 공간에서 가능한 것과 필요한 것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훌라의 역할은 가능한 것과 필요한 것을 뽑아내는 그 단계까지다. 지방자치단체 등이 이를 토대로 개발에 대한 고민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도시를 향해 질문하다
현재 안 대표는 서울특별시를 비롯한 다양한 지역에서 청년을 대상으로 도시 관련 교육을 진행하며, 더 많은 사람이 도시에 물음표를 던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일례로 그는 2021년부터 ‘아카이빙 기획자 과정’의 멘토 활동을 진행 중이다.
“타 아카이빙 기획자 과정보다 까다롭게 진행돼요. 지역의 고유한 자원을 찾고, 수집하고, 이를 재해석한 기획안을 작성해 각자의 실험 프로젝트까지 수행해야 해요. 어려운 과정임에도 열정 넘치는 참여자들을 보면 저도 에너지를 얻어요. 미래의 동료가 생겨나는 기분이라 애정도 생기고요.”
그가 이렇게 열심히 활동을 이어 나가는 이유는 획일화된 도시 개발을 막아내기 위함이다. 획일화된 개발은 난개발로도 간주할 수 있는데, 이를 멈춰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100년 이상으로 지속될 수 있는 건물 대신 단기간의 경제성만을 고려해 의도적으로 30년가량 지속 가능한 건물을 쌓아 올리는 지금의 도시 개발이 변해야 한다고 믿는다.
“‘도시재생’이라는 이름을 붙여 개발하지만, 도시는 자원을 빠르고 많이 쓰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어요. 전국적인 도시 개발의 사이클을 따져보면, 지금은 도시가 다시 무너지는 시기에요. 이때 엎지 않아도 되는 건물도 다 엎어버려요. 100년을 쌓아올린 기억도 허무는 데 하루면 충분하더라고요.”
난개발로 빠르게 사라지는 지금의 도시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감당할 세대는 결국 앞으로의 도시를 살아갈 청년세대라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그렇다면 지금, 청년은 무엇을 해야 할까. 안 대표는 도시를 ‘낯설게 바라보기’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관성적으로 도시를 ‘생존 공간’으로만 보는 시각을 벗어나, 그 장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환기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결국 도시에 대한 정의와 지향점을 재정립할 수 있는 첫 단추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도시를 낯설게 본다는 건 굉장히 단순해요. 주변을 둘러보며 10분 거리를 1시간 동안 걸어보거나, 똑같은 공간을 일주일 정도 매일 다른 시간대에 가서 기록을 해보는 방법 등이 있어요. 이렇게 하면 도심 속의 늘 똑같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사실은 무엇이 다른지, 그리고 안다고 생각했던 사이 얼마나 모르는 게 많았는지 알게 되거든요. 이 도시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어떤 도시에 살고 싶은지 등 도시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더 좋은 도시로 가득 찬 세상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어요.”
*아카이빙 : 특정 기간 동안 필요한 기록을 파일로 저장 매체에 보관해 두는 일
박희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