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이야기>흥망성쇠를 겪은 흥천사 이야기(한성대신문, 523호)

    • 입력 2017-05-15 00:00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 역에서 아리랑고개 쪽으로 가다 왼쪽 길로 접어들어 언덕을 오르면 아파트에 둘러쌓인 흥천사가 보인다.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뼈아픈 역사가 숨겨져 있다. 흥천사는 조선 태조임금이 신덕왕 후를 정릉에 모시고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1397년 정릉 옆에 창건한 절이다. 태종 때 정 릉을 현재 자리인 북한산 기슭으로 옮겼지만, 흥천사는 이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성 안에 남아있었다. 태종은 불교를 억압 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사찰의 토지와 노비 수를 제한하고, 전국에 242개 절만 남기고 없앴으며, 사찰 재산을 몰수했는데, 흥천사를 잘 보호하라는 태조의 유언덕분에 흥천사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 후 세종도 흥천사를 관아 건물처럼 정기적으로 중수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 31년(1449) 6월, 가뭄이 계속되자 이 절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며칠 후 비가 내려 세종이 승려 140명에게 상을 내렸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이 절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유학(儒 學)을 장려하면서 왕실의 지원이 줄어 흥천사는 쇠락하기 시작했다. 연산군 때는 화재로 절이 거의 타 버렸지만 복구되지 않았다. 폐허로 방치됐던 흥천사는 중종 때 유생들이 이단을 쓸어버리겠다고 밤에 불을 질러, 그나마 남아있던 건축물까지 전 소했다.
흥천사가 역사에 다시 등장 하게 된 것은 선조 때 절을 옮겨 짓고 ‘신흥사’라 이름을 고친 후 부터다. 이후 정조 때 새롭게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절을 중창한 뒤 다시 흥천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이때 대원군이 손수 ‘흥천사(興天寺)’라고 써준 사액현판이 지금까지 전해 지고 있다.
흥천사의 건축들은 모두가 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흥천사의 대방(염불 수행을 하도록 구성된 복합 법당), 흥천사 대종, 42수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은 국가 지정 문화재이고, 극락보전과 명부전은 지방문화재다.
지금의 흥천사는 기본적인 사찰의 업무를 하는 동시에 복지 활동을 통해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찰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흥천사의 주지인 정관 스님은 “현재의 흥천사는 불교 신자들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귀의처로, 시민들에게는 휴식처 로 자리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수현 기자
[email protected]

댓글 [ 0 ]
댓글 서비스는 로그인 이후 사용가능합니다.
댓글등록
취소
  • 최신순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