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송> 취재유단(取材有段) (한성대신문, 526호)

    • 입력 2017-09-25 00:00

우리 문학사에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긴 조지훈 시인은 생전에 주도유단(酒道有段)이라는 글을 남긴 바 있다. 굳이 풀어내자면 음주에도 단()이 있다는 뜻이다. 제깟 술 마시는 일에 무슨 단이 있고 급이 있냐고 따져 물을 수 있겠지만, 단지 시인의 풍류라고만 치부하기에는 글의 내용이 꽤 흥미롭다.
시인은 주도(酒道)를 총 9급과 9단으로 나누었는데, 1단에 이르러 주도(酒徒)에 이르지 않은 자는 모두 주졸(酒卒) 이하라고 하여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고 판단한다. 가장 낮은 9급은 불주(不酒)라고 하는데,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마시지 않는 사람을 이른다. 이후 높은 급수로 갈수록 술을 겁내지 않으나 취하는 걸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憫酒), 술자리로 얻을 잇속이 있을 때만 마시는 사람(商酒), 밥맛을 돋우기 위해 마시는 사람(飯酒) 등으로 서서히 수준이 올라간다.
단에 올라서면 설명 내용이 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주급(酒級)’들이 술을 두려워하거나, 무언가 목적을 위해 마신다면 1단인 애주(愛酒)는 술을 취미로 먹는 사람을 말하며, 이후 7단은 술은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인 사람, 8단은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마시지는 않는 사람으로 수준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마지막 9단인 폐주(廢酒)는 술로 인해 딴세상으로 가버린 사람을 칭한다. 한없이 술과 가까워졌다가 점점 술에서 멀어지고, 결국 나중에는 술과 함께하다 같이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술에도 단이 있는데 취재에는 단이 없다고 한다면, 비록 학생일지언정 교내언론에 몸담고 있는 입장에서 서운한 마음이 들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취재도 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숙련도에 따라 단계가 나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 신문사에는 수습기자, 정기자, 부장기자 등의 단계가 실존한다. 그럼에도 굳이 시인의 글을 인용한 것은, 취재로 급()은 이루었으나, 과연 단()을 이루었는가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단을 이루면 일단 그것에서부터 멀어져야한다. 어떤 목적과 이유에서 행한 것이었든지 일단 취미정도로 격하되어야하는 것이다. 기자보고 취재에서 떨어지라니? 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시인의 풍류정도로만 취급했던 이 글이 다시금 다가온 것은 편집국장으로 취임한 이후다.
편집국장은 원칙적으로 취재활동을 하지 않는다. 덕분에 다른 기자들이 취재하는 모습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사태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과 문제의 핵심은 의외로 담당기자가 쉽게 짚어내기 어렵다. 기자도 사람인지라 기계처럼 정보를 선별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개인적인 견해가 관여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취재에서 떨어져보면 그런 것들은 쉽사리 눈에 띄기 시작한다. 취재에서 떨어졌더니 되려 취재와 가까워진 것이다. 취재에도 과연 단이 있을까? 아직까지는 물음표로 끝날 말에 불과하지만, 언젠가 딴세상으로 가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주형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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