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인도vs중국vs한국의 ‘원조’ 쟁탈전 (한성대신문, 538호)

    • 입력 2018-10-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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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19-10-14 19:35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음료 중 하나인 차(茶). 인류가 차를 처음 발견한 때는 기원전 2737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전해지는 신화에 의하면 ‘신농(神農)’이라 불리는 제왕이 100가지 풀을 맛보다가 독초를 먹고 중독됐는데, 우연히 찻잎을 먹고 해독됐다고 한다. 신농이 기원전 2700년경 인물임을 감안하면 차의 역사는 어림잡아 5,000년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차 문화를 향유하게 됐을까?

인도 공주가 혼수품으로 들여온 차 씨앗
우리나라에 차가 유입된 과정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그중 ‘인도전래설’은 차와 관련된 설화 중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불교통사』의 기록에 따르면 가야의 시조 수로왕은 인도 아유타 출신 공주 허황옥을 신부로 맞이했다. 인도전래설에 의하면 허황옥이 차 씨앗을 혼수품으로 가져왔고, 이로 인해 우리나라 차 재배가 시작됐다고 한다.
실제 허황옥이 차 씨앗을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김해 지역에는 ‘장군차’의 야생 군락지가 남아 있다. 장군차는 인도 아쌈 등지에서 생산되는 대엽종으로, 찻잎이 크고 떫은맛을 내는 탄닌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허황옥에 의해 차가 유입됐다는 ‘인도전래설’에 더욱 힘을 싣고 있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가야에는 수로왕 후대 임금의 제사상에 차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차가 허황옥이 가져온 차인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실제 가야에 차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인도전래설’에 근거를 보태고 있다.

당나라에서 씨앗을 품고 돌아온 사신
또 다른 유래로는 ‘중국도입설’이 있다. 『삼국사기』 본기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에 파견한 사신 ‘대렴’이 신라로 돌아올 때 차 씨앗을 들여와 지리산 쌍계사와 화엄사 일대에 심었다고 한다.
이 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차가 최초로 재배된 것은 대렴에 의해서라고 주장한다. 차를 마시는 풍습은 선덕여왕(632년) 때부터 있어왔지만, 그때는 차를 직접 재배해 마신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중국도입설’은 『삼국사기』에 기록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근거를 확보하고 있지만,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지리산에 씨앗을 심은 위치가 정확히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어서다. 아직까지도 차가 처음 재배된 곳이 어딘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김미숙(한국차문화협회) 강원지부장은 “우리나라의 차 유래설 중 ‘중국도입설’은 타당성이 부족하다. 대렴 이전에도 이미 차를 마시고 있었고 제례 등에 차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라며 ‘중국도입설’에 대해 반박했다.

원조 논란의 종지부를 찍을 소엽관목
차 문화가 우리나라 내부에서 독자적으로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자생설’도 있다. 일반적으로 차나무는 고생대 토양에서 잘 자라는데, 백두산·울릉도·한라산 등을 제외한 한반도 대부분 지역은 고생대 토양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 영·호남지역을 비롯한 우리나라 각지에서 야생 토종 차가 자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자생설’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자생설’은 차의 고장 하동 출신인 차 연구자 고(故) 하상연 씨가 생전 내세운 주장에서도 그 근거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차나무의 원조국을 인도나 중국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인도와 중국이 온대지방에서 자라던 대엽종과 대엽교목종 차나무를 자국에 옮겨 심어 대량재배한 뒤 전 세계로 수출했기 때문이다.
온대지방에 해당하는 우리나라에도 차의 원종(原種) 중 하나인 소엽관목이 서식하고 있다. 인도·중국의 차 품종을 원조로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차나무의 원종은 열대·아열대·온대지방을 막론하고 폭넓게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온대지방의 원종을 가져다 재배해 규모를 확대한 인도·중국을 차의 원조국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지부장은 “우리나라 차의 시초는 고조선 시대부터라 할 수 있다. 고조선 시대에는 제천의식을 거행할 당시 신에게 바치는 성스러운 음료로서 ‘백산차’를 끓여 올렸다”고 말하며 ‘자생설’에 무게를 실었다.

정수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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