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조각조각' 한글을 내 맘대로 잇다 (한성대신문, 539호)

    • 입력 2018-11-19 00:00
한글 해체 현상, 15·20세기에도 나타나

 “동의? 어 보감”, “오지고지리고렛잇고 아미고”. ‘과연 한글이 맞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이러한 말투는 청소년을 중심으로 유행하는 ‘급식체’다. 급식을 먹는 세대 즉, 10대들이 자주 사용하는 문체라는 뜻인데, 최근에는 20대 사이에서도 자주 쓰이고 있다. 이외에도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야민정음’ 등 기존 문법을 파괴하는 ‘한글 해체 현상’이 1020세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현 상황을 보면 “세종 대왕님이 무덤에서 통곡하신다”와 같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한글 해체는 1020세대가 자아낸 ‘한글 파괴’의 현장인 것일까? 취재에 따르면, 아마도 세종대왕이 무덤에서 통곡할 일은 없을 것 으로 보인다.

 활자에서 한글 해체에 이르기까지

 한글이 창제된 직후인 15세기 서적에서도 한글 해체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이 한글 해체 현상을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서적이다. 세종은 한글 창제 직후 한글로 책을 찍어내기 위해 한글 활자를 주조했다. 활자로 인쇄하면 자유롭게 활판을 해체하고 재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글 활자가 처음 만들어지던 시기에는 사용 빈도가 높은 활자는 충분히 많이, 거의 쓰이지 않는 활자는 상대적으로 적게 제작했다. 이 때문에 서적 제작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많이 쓰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활자가 예상과 다르게 자주 쓰여 곤란해진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문제는 활자 제작자의 센스로 해결됐다. 예를 들어, ‘곰’을 ‘문’으로 180도 회전시켜 사용한 것이다. 활자를 새로 주조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해결 방안이었다. 실제로 『석보상절』을 살펴보면 문헌 에 ‘ㄱㆍㄷ’이 반복해서 나온다. 이는 지금의 한글과 형태가 다르고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워 학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런데 ‘ㄱㆍㄷ’을 ‘곤’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등장해 학계에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활자 주조 기술이 세밀하지 않아 이미 만든 활자를 재사용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주장이다.

근대 시에 녹아 있는 한글 해체

 이러한 한글 해체 현상은 20세기 초반 문단에서도 끊임없이 시도됐다. 1920년대, 시인 정지용이 쓴 <슬픈 印像畵(인상 화)>에서는 ‘내ㅁ새’, ‘머-ㄴ’,‘큰기ㄹ’ 등 중성과 종성이 서로 분리된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동시대 시인 김니콜라이의 <輪轉機(윤전기)와 四層(사층)집>에서는 더욱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는데 시인은 ‘音響 (음향)!’의 활자 크기와 굵기를 다양하게 표기했다. ‘音響!’을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점점 커지게 만들었고 글자가 굵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글자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더불어 기호 X·!·!! 등을 반복적으로 사용해 다른 시와 확연한 차이를 두었다. 이러한 시도는 더욱 심화돼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 ‘이상’, ‘김기림’ 등의 시에서 더욱 도드라졌다. 시인 이상은 <線(선)에 關(관)한 覺書(각서)6>에서 색다른 한글 해체를 시도하기에 이른다. 활자 ‘4’ 를 상하·좌우 반전을 시도해 배치한 것 이다. 이 때문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시를 읽을 수가 없는데, 이에 대해 이어령 문화평론가는 일전에 “숫자 4의 개념을 버리고, 지도에서 북쪽 방위를 나타내는 화살표 4와 숫자 4의 모양이 같다고 보아, 4의 방향을 바꿔놨다”고 언급했다. 이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1980년대에도 한글 해체 현상은 시인들에게 사랑받으며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

시각 유희만이 살아남는다


 종이 위에 찍어내던 활자부터 인터넷 공간에서 쓰이는 디지털 문자에 이르기까지 한글은 매체의 특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해왔다. 이에 대해 강옥미(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디지털 공간에서 일어난 한글 해체는 글자에 감정을 담아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문자 유희의 일환이자 시각 유희의 도구나 다름없다. 그중 시각 유희는 문자가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서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급식체로 일컬어지는 모든 표현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어의 역사를 살펴보면 시각 유희에 적응한 문자만이 살아남았다. 이러한 사실로 미뤄볼 때 급식체는 이 같은 변화에 적응한 언어”라고 설명했다.

심상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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