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人> 잎사귀가 머금은 향기로 세상을 가득 채울 때까지 - 시인 이진호(한성대신문, 546호)

    • 입력 2019-06-03 00:00
이진호 씨

노란 봄 뽐내는 꽃들 사이

풀이 죽은 자색 꽃 하나

보이는 대로 믿었기에

마냥 못난 꽃인 줄 알았는데,

이듬달 마주한 그 꽃은

보랏빛 독무대를 꾸렸더라

봄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더 푸른 너의 봄을

-이진호, 「앞에」

노란 봄에 풀죽어있던 자색 꽃이 자신만의 봄을 맞아 독무대를 꾸미듯, 보랏빛 향기를 머금고 개화(開花)할 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학교에 재학 중인 시인 이진호(경영 4) 씨다.

이 씨는 작년 서울시인협회에서 선정한 ‘제1회 SNS시인상’에서 대상을 수상해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얼핏 감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경영학도가 등단이라니, 그는 어떤 연유로 시를 쓰게 된 것일까? 봄과 여름 그 사이 어디쯤의 오후, 조금은 특이한 이력을 가진 그를 학교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러던 와중, 군복무 시절 좀비가 등장하는 한 영화를 보게 됐고, ‘내가 써도 저것보다는 잘 쓰겠다’는 생각이 들어 좀비를 소재로 처음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때를 기점으로 그는 본격적으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소설에 흥미를 느낀 그는 군 제대 후 우리학교 문학동아리 ‘이무기’에 입부했다.

“처음에는 시보다 소설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다 오랫동안 만난 연인과 헤어지게 됐는데, 감정을 추스르기가 힘들더라고요. 제 마음을 다스릴 방법을 찾다가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시를 쓰기 시작한 이 씨는 친구의 권유를 받아 페이스북에 가명으로 시를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를 지인들하고만 공유했었는데, 조금씩 세간의 관심을 끌며 SNS에서 이름을 알리게 됐다.

시작이 ‘사랑’이었기 때문일까. 그의 시는 대부분 사랑과 이별을 소재로 한다. 이 씨는 연인, 친구, 가족 등 우리가 살아가며 맺는 다양한 인간관계가 모두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을 시에 담아내며 자신의 마음을 비워낸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가장 애착이 가는 시로 친구와의 이별을 담은 <가시>를 꼽았다.

그는 “이 시에서는 인간관계를 면도에 비유했어요.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 무리가 있었는데, 정말 사소한 일로 싸워 이젠 다 같이 볼 수 없게 됐고 그 일 때문에 이 시를 썼죠. 인연을 끊어내는 것이 처음에는 마음에 상처도 나고 아프지만, 반복하다보면 상처에 무뎌지고 익숙해지는 점이 면도와 유사하다고 느꼈거든요”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지난 5월, 동료 시인들과 함께 발매한 시집 <남이 되어가는, 우리>의 본인 파트 소제목을 ‘못난 꽃도 봄을 기다린다’라고 지었다. 그에게 소제목의 의미를 묻자, 그는 “‘못난 꽃’은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제 자신을 의미하는 거예요. 하지만 꽃이 봄을 기다리듯 제가 가진 잠재력을 발현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저도 언젠가는 제 능력을 꽃피울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시 쓰기도 그 과정 중에 하나고요”라며 웃어보였다.

그렇다면 그는 활짝 피어난 미래에도 여전히 ‘시인 이진호’일까. 이 씨는 이렇게 답했다.

“시로 먹고 살 수 있으면 정말 좋겠지만, 사실 현실적으로 어렵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글을 쓴다는 특기를 살려 잡지사 취업을 준비 중이에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시인 활동을 병행하고 싶거든요”

누군가에게는 목표일 ‘시인’이 그에게는 또 다른 봄을 맞을 발판인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궁금해진다. 과연 이 발판을 딛고 봄을 맞아 활짝 핀 못난 꽃은 어떤 향기로 세상을 가득 채울까.

사람을 처음 잃었을 즈음

턱에는 가시가 박혔다

온전히 두기에는

스스로 가엾게 여겼기에

불그죽죽 모질게 깎아낸

그을음은 항상 내 것이었다

낡은 달력을 버릴수록

억센 가시는 늘어났지만

몇 포기 자란 미련일랑,

깎아내는 것이 어렵진 않더라

어느새 어른이 된 까닭으로

-이진호, 「가시」

정명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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