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人> 비단 휘장 뒤 소탈한 진심을 이야기하다, 한국화가 김현정 (한성대신문, 548호)

    • 입력 2019-10-1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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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19-10-13 21:42

[사진 제공 : 김현정아트크리에이티브센터]

여기, 그림 속에 다채로운 색의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가 있다. 수줍은 미소와 함께 다소곳이 인사를 할 것 같았는데, 이게 웬걸. 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먼지떨이를 든 채 개선장군처럼 말에 올라타 달리기도 하고,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 와구와구 먹기도 한다. 이 독특한 콘셉트의 여자가 등장하는 그림들은 이른바 ‘내숭 시리즈’로, 바로 한국화가인 김현정(30) 씨의 작품이다.

사랑스러운 거짓말, 내숭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김 작가는 본인의 그림 속 여자와 매우 닮아있었다. 그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했다. “제 그림들은 기본적으로 자화상이에요. 남자나 어린아이, 노인을 그릴 수도 있지만, 작품에 진정성을 부여하기 위해 제 모습만 화폭에 담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가 처음부터 자화상을 그렸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화상을 그리게 된 계기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대학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타인의 시선 때문에 우울증을 앓아 상담을 받아야 했어요. 치료의 일환으로 제게 상처를 준 사람을 그려야 했죠. 인물화인 만큼 모델이 필요했는데, 대학생이다 보니 금전적인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렇다고 싫어하는 아이한테 가서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그려야 하니 모델이 되어 달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같은 또래의 여성인 제 자신을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렸어요.”​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그림은 온전한 자화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외형만 그의 모습일 뿐, 묘사된 인물의 행동과 내면은 타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치료를 이어나가던 중, 그는 자신의 외형과 너무도 닮은 그림 속 여자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라고 앞뒤가 같은 사람일까? 나는 그 아이와 다른 솔직한 사람이라고 자신할 수 있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더 이상 그 사람을 미워할 수가 없더라고요. 이때부터 앞뒤가 다른 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타인의 시선 앞에 솔직하지 못한 건 누구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는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이 곧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내숭’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숭은 결국 거짓임이 표가 나기 때문에 사랑스럽기까지 하다고. 그래서 그는 그림 속의 자신을 ‘내숭녀’라 부르고, 내숭녀가 등장하는 그림들을 ‘내숭 시리즈’라고 부르게 됐다.

치맛자락에 비춰진 속마음

김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내숭’을 회화적 표현 기법을 통해 드러냈다. 내숭녀가 입은 한복 치마의 속이 다 비치도록 표현한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인물의 누드를 그리고, 그 위에 수묵(연한 먹물)으로 치마를 다시 그려냈다.​

그렇다면 왜 하필 한복일까? 그는 한복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옷이자 비밀스러운 옷’이라고 말했다. 비밀스러운 옷의 속을 훤히 내보임으로써 내숭을 떠는 인물의 속마음이 들여다보인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또, 고상한 옷을 입고 고상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이 내숭의 이중적 모습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한편으로 작품의 소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한복을 즐겨 입기도 한다.​

“제 작품 중에 치마의 방향이 반대로 그 려진 게 있어요. 한복을 디자인하시는 분께서 이 사실을 지적해주셨는데, 내가 그리는 소재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에 너무 부끄럽더라고요. 그때부터 더 다양하고 섬세한 표현을 위해 한복을 자주 입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저에게 교복 같은 옷이 되어버렸지 뭐예요(웃음).”

▲<내숭 : 애국자>, 한지 위에 수묵과 담채, 콜라쥬, 157×120cm, 2016
[작화 제공 : 김현정아트크리에이티브센터]

대중을 향해 내딛은 한걸음

한편, 김 작가는 그림 작업 외에도 여러 단체와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거나, 강연에 나서는 등 다양한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대중에게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서다. 마음 같아서는 항상 전시회를 열고 대중들과 만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최대한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다.​

“사실 사람들이 미술 전시를 자주 보러 가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생활 속 살아 숨쉬는 미술관’을 만들고 싶었어요. 예를 들어 종이컵에 그림이 있으면 비록 원화는 아니지만 컵을 사용하면서 작품도 감상하게 되잖아요. 그렇게 사람들의 삶에 미술이 녹아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대중과 소통하려는 그의 노력은 작품의 소재를 찾는 방법에서도 드러난다. SNS와 오프라인에서 대중들과 소통하며 소재를 얻는 것이다. 여기에는 화가 혼자만의 아이디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대중의 이야기가 담긴 것이 더 가치 있다는 그의 소신이 반영돼 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최근에 진행된 개인전 ‘계란 한 판, 결혼할 나이’를 준비할 때 도 대중들의 의견을 받았다. ‘결혼’이라는 주제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다. 또, 작가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설명을 들으면 미술을 더 쉽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직접 관람객에게 도슨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전시장에 있는 것이 지치기는 하지만, 자신의 그림을 보고 즐거워하는 관람객을 보며 다시 그림을 그릴 힘을 얻는다고.​

“음악을 잘 몰라도 즐기기 위해 공연장을 가듯, 미술이 대중들에게 더 쉬운 분야가 되는 것이 제 꿈이에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계속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고요. 지속적으로 대중들과 소통을 이어간다면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이 미술을 편하게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요?”

▲<결혼: 천지차이(小)>, 한지 위에 수묵과 담채, 콜라쥬, 92×190cm, 2019
[작화 제공 : 김현정아트크리에이티브센터]

정명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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