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훈민정음 창제, 그 주역은 누구인가? (한성대신문, 549호)

    • 입력 2019-10-14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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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19-10-14 14:23

▲①『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 기사. ‘친제(親制)’라는 표현을 통해 세종이 직접 훈민정음을 지었음을 드러낸다. ②『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 9월 29일 기사.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을 언급했다. 여기서 ‘우리 전하’는 세종을 뜻한다. 

우리의 문자가 없어 중국의 한자를 빌려 쓰던 시절, 문자는 곧 지식이었고 지식은 곧 권력이었다. 생계를 잇기 급급했던 백성들은 문자를 배울 수 없었고, 무지로 인해 불합리한 일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에 안타까움을 느낀 세종이 우리의 문자를 만드니, 그것이 바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訓民正音)’이다. 그런데 최근 훈민정음 창제를 다룬 영화 <나랏말싸미>가 개봉하면서, 훈민정음이 세종의 단독 창제물이 아니라는 설이 주목받고 있다. ‘혜각존자 신미대사’라는 스님이 창제 과정에서 세종을 도왔다는 것이다. 이외에 문종 혹은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과 함께 훈민정음을 공동 창제했다는 설도 있다.

훈민정음의 창시자, 세종만이 아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사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박진호(서울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당시의 모든 사료(역사적 자료)를 종합해봤을 때, 훈민정음은 세종의 단독 창제물이 맞다”고 단언했다. 우리학교 이상혁(상상력교양교육원) 교수 역시 “세종이 훈민정음을 단독으로 창제했다는 사실은 『조선왕조실록』 이나 『훈민정음 해례본』에 명확히 드러나 있다”고 말했다.

한글 창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세종실록』 1443년 음력 12월 30일자 기사를 보면 “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으니…”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원문을 보면 이 구절에서 ‘친제’라는 단어가 언급된다. 친제에서의 ‘친’은 임금이 직접, 손수 만들었으며, 누군가에게 명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가장 명확한 증거는 세종이 직접 저술한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이다. 세종은 이 글에서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서 …(중략)… 내가 이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라고 서술했다.

이에 대해 김슬옹(훈민정음연구소) 소장은 “세종이 직접 창제 동기를 기술하면서 ‘내가 만드니’라고 한글 창제 주체를 밝힌 것은 세종의 단독 창제를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며, “다른 주체와의 공동 창제설이 맞다면 이 말을 부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에서도 ‘우리 전하께서 친히’라는 표현을 사용해 세종 친제를 밝히고 있다”고 역설했다.

공동창제설의 단초와 그 진실

그렇다면 최근 논란이 된 ‘신미대사’는 어떤 연유로 등장하게 된 것일까. 김무봉(동국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불경 언해본 간행 작업의 중심에 신미대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은 유교 국가를 표방했지만, 기층 민중들 사이에서는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불교의 영향력이 남아 있어 불교 경전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따라서 이를 충족하기 위해 불교 경전 번역이 활발하게 이뤄졌으며, 번역 초기 단계에 신미대사가 활발히 참여했다는 것이다. 신미대사가 번역에 참여한 불경 언해본의 대표적인 예 로는 1447년 즈음 간행된 『석보상절』이 있다.

김 교수는 “번역이라는 것이 고난이도의 작업이라 훈민정음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다면 언해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따라 ‘신미대사가 창제 과정에 관여했기 때문에 수많은 불경 언해를 할 수 있었을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온 듯하다”며 “그가 창제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불경 언해를 통해 훈민정음의 확산과 정착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한편, 문종이 공동 창제했다는 설에 대해 이 교수는 “문종은 ‘조력자’일 뿐 공동 창제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직해동자습』* 서문에 “우리 세종과 문종께서 이를 딱하게 여기시어 이미 훈민정음을 만드시니…” 라고 문종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문종에 대한 이야기는 사료를 통틀어 이 문서에 단 한 번 나타나 공동 창제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집현전 학자들과의 공동 창제설 역시 마찬가지다. 이 교수는 “문자로서의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이 단독으로 진행한 것이 확실하다.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든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답했다.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을 보면, “…마침내 상세히 해석을 가하여 여러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라고 명하시니, 이에 신(臣)이 집현전 응교 최항, 부교리 박팽년과 신숙주, …(중략)… 등과 더불어 삼가 모든 해석과 범례를 지어…”라고 서술돼 있다. 이 글로써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의 명을 받아 함께 해례본을 저술했음을 밝혔다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세종이 직접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이 명백함에도, 왜 공동 창제설이 제기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만큼 뛰어난 문자를 왕이 혼자 만들었을 리 없다는 작은 의심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며 “공동 창제설은 모두 정황 증거 내지는 단편적인 기록에서 비롯된 추측일 뿐이다. 세종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는 보조 수준에 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훈민정음을 세종이 단독으로 창제했다는 ‘친제설’은 가장 객관적 사료인 『조선왕조실록』과 『훈민정음 해례본』 에 의거한 변함없는 진리”라고 강조했다.

*『직해동자습』 : 조선전기의 문신들이 시문을 모아 편찬한 시문선집 『동문선』에 실려 있는 성삼문의 글. 현재는 원본이 전해지지 않는다.

정명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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