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人> 헤드윅처럼, 프리실라처럼 진정한 나를 찾는 나나영롱킴 (한성대신문, 583호)

    • 입력 2022-11-07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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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2-11-07 23:47

<편집자주>

‘드랙 아티스트(Drag Artist)’, 대부분의 사람에게 낯선 직업일 것이다. 드랙 아티스트란 형형색색의 가발과 진한 화장 등을 통해 자신을 뽐내는 이들이다. 사전에서는 이들을 ‘사회적으로 고정된 성별의 정의에서 벗어나 과장된 메이크업과 패션, 퍼포먼스 등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가’로 정의하기도 한다. 드랙 아티스트들은 주로 클럽을 비롯한 여러 공연장에서 노래와 춤 그리고 립싱크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드랙은 긴 치마나 드레스가 무대에서 끌리는 양상을 보고 '끌다'의 뜻을 지닌 ‘drag’에서 가져온 표현이다. 과거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을 당시, 서양에서 여성은 무대조차 오를 수 없기에 남성이 여성의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때 여성의 역할을 분한 공연자의 드레스 자락이 끌린다는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통상적으로 드랙 아티스트가 남성성을 강조하면 ‘드랙 킹’, 여성성을 강조하면 ‘드랙 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최근에는 드랙의 범위가 굉장히 넓어져 동물로 분장하는 아티스트들도 존재한다. 그만큼 드랙 아티스트가 표현할 수 있는 범위는 무궁무진하며, 드랙의 정의 역시 다양하다.

하지만 드랙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다소 생소한 문화다. 서양에서 시작된 이들 문화는 국내 대중에게 알려진 지 비교적 얼마 되지 않았으며, 일부 보수적인 계층이 가지는 드랙에 대한 오해는 뜨거운 논쟁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편견을 떨쳐내고 관중들의 환호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있다. 드랙 아티스트, 나나영롱킴(35)이다.

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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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영롱킴 [사진 : 박희진 기자]

나나영롱킴의 본명은 김영롱이다. 예명인 나나영롱킴은 학창시절 불리던 별명을 오마주한 것이다. 당시 학급에서 키가 큰 4명을 텔레토비라 칭했는데, 그중 3번째로 키가 컸던 김영롱을 모두 ‘나나’라고 불렀다.

학창시절부터 그는 활기찬 학생이었다. 특히, 어렸을 적부터 자신을 꾸미고 무대 오르기를 좋아해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다. 이 시기에 그는 영화 「헤드윅」과 「 프리실라」 등의 작품을 자주 접하게 됐고, 드랙을 알게 됐다. 연기 공부보다 드랙에 더 큰 흥미를 느낀 그는 학교에서 벗어나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대학에서 그에게 요구한 것은 서정적인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1년을 채우지 않은 채 학교를 그만뒀다.

“저는 학교에 다니면서 스스로 다양한 캐릭터를 많이 연구했어요. 예를 들면 헤드윅 등장인물을 비롯해 사이코패스, 범죄자 등을 공부했죠. 정말 다양한 캐릭터가 있는 것에 반해 대학에서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 치중된 수업이 이뤄져 아쉬웠어요. 학교를 그만두고 관심 있었던 <헤드윅>과 <프리실라> 연극을 보러 다녔는데 주인공의 행동이나 끼가 너무 화려하고 멋있었죠. 자연스레 내가 무대 위에서 직접 연기 해봐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드랙 분장을 하지 않은 김영롱이다. [사진 제공 : 나나영롱킴]

그는 본격적으로 드랙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직 SNS와 유튜브가 활발하지 않았던 2007년, 나나영롱킴은 드랙 분장까지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수준에는 도달했지만 그 이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이 많았다. 그러던 중, 드랙 분장을 마친 그는 공연을 하기 위해 무작정 파티와 공연이 자주 열리는 클럽으로 향했고, 클럽 관계자에게 드랙 공연에 대해 설명했다. 공연을 하기 위한 무모함이었다. 드랙 공연의 첫걸음은 그렇게 드랙 문화를 흥미롭게 여긴 클럽 관계자의 승인으로 겨우 떼졌다.

“드랙 분장을 막상 마쳤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어요. 당시 일반 클럽에 드랙 분장을 하고 무작정 찾아가 클럽 사장님을 만났는데 정말 다행히도 클럽 사장님이 연극을 전공하신 분이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헤드윅>과 <프리실라>를 알고 계셨죠. 그렇게 드랙 공연을 흔쾌히 수락해 주셨고, 나중에는 팀도 꾸려졌는데 그때부터 드랙을 하는 사람들과도 접점이 생겼어요. 정말 옛날부터 드랙하시던 선배들과도 인연이 닿게 됐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저는 조금 더 자신감 넘치고 당돌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마냥 자신감이 넘치는 그에게도 고민이 필요했던 순간이 존재했다. 드랙을 처음 시작했을 때 이를 주변인에게 쉽게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덧붙여 우리 사회의 낯선 시각 역시 그의 고민거리에 한몫했다. 과거에는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드랙을 터부시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다수였으며, 단순히 드랙을 LGBTQ+*의 문화로 바라보는 인식 역시 팽배했다. 심하게는 혐오 논란까지 점화됐는데, 이를 바로잡기보다 방치하는 문화 때문에 대중화까지 더욱 긴 시간이 소모됐다. 이 때문에 나나영롱킴이 주변인에게 드랙을 한다고 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현재 드랙이 한국 사회에서 대중화돼가고 있다 한들, 아직도 드랙을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대다수다. 실제로 공연 도중 나나영롱킴을 향해 맥주병과 계란이 날아온 적이 있었을 정도다. 이처럼 드랙 문화에 반감을 갖고 부정하는 이들 역시 일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공간에서의 시선은 더욱 참혹했다. 드랙 아티스트 중에서도 제법 알려진 그에게 악플은 꽤 익숙한 일이다.

“처음 드랙을 시작했을 때 주변 지인들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비밀이었죠. 그때 당시에는 지금과 다르게 사회가 오픈되지 않았어요. 물론 드랙을 한다고 해도 주변 지인이 저에게서 떠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때는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숨기다가 클럽 공연이 많아지고 행사도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친구들이 알게 됐어요. 제가 끼가 많은 편이라 다들 호의적이었죠.”

과거 드랙 아티스트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던 대한민국에서 드랙을 공부하기란 쉽지 않았다. 국내 사이트에서 드랙에 대한 자료는 거의 찾을 수 없었으며, 어렵게 자료를 찾아도 국내가 아닌 해외 드랙 아티스트의 자료뿐이었다. 이처럼 한정된 자료를 가지고 그는 화장을 연습했고 의상도 직접 제작했다. 이 과정에서 진한 쌍꺼풀과 넓은 아이홀을 지닌 사진 속 드랙 퀸들에 비해 그는 상대적으로 좁은 아이홀과 속쌍꺼풀을 가지고 있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의 얼굴에 적절한 드랙 화장법을 연구해야 했던 이유다.

“과거에는 드랙 화장을 하기 위해 외국 드랙 퀸들의 사진으로 수백 번 아니 수만 번 연습했어요. 정말 열심히 연구했죠. 그런 과정들 덕분인지 지금은 화장에 자신 있어요. 실제로 사단법인 한국분장예술인협회에서 ‘BEAUTY 소상공인 경진대회 & Int’l Beauty Artfair’의 심사도 진행했어요.”

▲나나영롱킴이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사진 제공 : 나나영롱킴]

이렇게 열정적인 그였지만 2013년경 경제적인 이유로 드랙을 잠시 그만둬야 했던 적도 있다. 드랙에 필요한 의상, 가발, 메이크업 도구 등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지만,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는 형편이 여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드랙 아티스트를 이어 나가는 것은 욕심이라고 느껴져 잠시 드랙을 내려놓고 한 구두 쇼핑몰 회사에 취업했다.

“잠시 슬럼프가 있었어요. 당시 공연도 적었고 형편이 어려웠죠. 그런 상황에서 계속 드랙을 하는 것은 욕심이라고 판단했어요. 어느 정도 여유가 되고 경제적 기반이 마련된 상태에서 드랙을 다시 업으로 해나가겠다고 결심했고, 잠시 구두 쇼핑몰 회사에 들어갔어요. 생각보다 일이 잘 맞아서 3년 정도 일했지만,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니 다시 드랙을 찾게 되더라고요.”

현재 그는 다양한 활동으로 대중과 만난다. 유튜브 채널 ‘NEON MILK’의 구성원이며, 각종 광고와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개인 전시회도 성황리에 마쳤다. 나나영롱킴의 단독 사진전이었는데,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당초 예상인원의 6배의 인원이 참여했을 정도다.

“저 같은 경우에는 다른 드랙 퀸들에 비해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있어요. 열심히 하다 보니 기회가 찾아와 광고와 방송도 하게 됐죠. 매일 드랙의 기록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그것을 보고 피디님, 감독님, 행사관계자분들까지 모두 저에게 직접 연락을 주셨어요. 생소한 문화다 보니 인맥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많았는데 말도 안 돼요. 전 제가 직접 발로 뛰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생각해요.”

나나영롱킴은 드랙 아티스트가 추억을 주는 존재라고 여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추억을 남겨주고 싶은 그는 퀴어문화축제**에 자주 참여하곤 한다. 주로 성인만 출입할 수 있는 클럽에서 공연하는 그에게 보다 다양한 세대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부터 노년층까지 모든 세대가 어우러지는 퀴어문화축제의 매력으로 보다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을 꼽는다.

“보통 클럽에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방문하는 사람이 많아요. 동시에 재밌는 드랙 문화도 경험해보기를 원해 노력하는 중이에요. 퀴어문화축제는 공황장애를 겪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주 참여했어요. 드랙 공연이 주로 클럽에서 진행되다 보니 저를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예를 들어 미성년자분들은 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잖아요. 그래서 퀴어문화축제에 자주 참여해요. 모든 세대가 참여할 수 있는 축제니까요. 실제로 자녀분과 함께 오는 어머님도 많이 계세요. 정말 다양한 팬층을 만날 수 있어 신기해요.”

마지막으로 나나영롱킴은 청년들에게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라고 권한다. 고민 없이 무엇이든 도전하고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놓치지 말고 한 번쯤은 경험해보기를 바라는 입장이다.

“지금 느끼는 그 기분대로 사세요.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조건 해보기를 바랍니다.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등 자신에 대한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많을 텐데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면 됩니다. 그래야 행복해져요.”

*LGBTQ+ :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성소수자 등의 성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

**퀴어문화축제 : 2000년대부터 매년 5~6월경 열리는 성소수자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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