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한성문학상 - 시 부문 당선작> 방치

    • 입력 2022-12-05 00:01
    • |
    • 수정 2022-12-05 01:16

[삽화 : 김한나(패션3)]

방치

김도경

바나나를 주웠다

생각보다 노랗지 않았다

검었던 것 같다 껍질을 찢고 안을 들여다봤을 때

너무 오래 방치된 것은 그렇다고

달궈진 팬 위에서 잊혀갔던 토스트의 새까만 살을 씹다가 네가 말했다

그날 무식하게 겉면을 태운 슬픔이

긁어낼 가위도 없이 식탁 위로 놓여서

의자를 넘어뜨리고 일어나 모르는 곳을 향해 걸었다

발밑에 눈이 쌓였고

생각보다 하얗지 않았다

태어나는 것은 없고 죽은 것만 또 한 번 죽는 계절이어서 이곳은 끔찍하게 지저분해 언제인가 새벽 내 쌓인 눈 무덤의 시커먼 멱을 짓밟다가 아하하 네가 웃었는데

너는 머리가 박살 난 채 그대로 사십 분 동안 눈 속에 묻혀 있었다고 했다

뭉쳐서 굳은 피가 너무 오래 튀긴 음식 같았다

검은 옷을 피부처럼 두른 사람들이

팔을 들어 서로의 몸을 긁는 걸 보았다

필사적으로

나는 벽에 붙어

혼자 몸을 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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