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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레 미제라블’이 도래했다. 교육 환경 악화에 항의하며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생활비 부담과 공공서비스 문제로 번졌으며 이제 유럽 각국으로 확산하고 있다. 국가 재정 부담이 커지는 가운데 공공서비스의 질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에 대해 프랑스를 넘어 유럽 사회 전체가 과제에 직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프랑스의 상황은 더 이상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공공서비스와 관련된 목소리가 끊이지 않아 왔기에 프랑스의 실태를 살펴볼만 하다. ‘아비규환’ 프랑스의 속내를 들여다보자.
김산 기자
지난 9월, 시위는 파리 외곽 크레테유 지역의 한 고등학교에서 시작됐다. 이후 시민들의 참여가 잇따르면서 파리 전역과 마르세유 등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시위는 약 한 달 만에 이탈리아와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 각국으로 번졌다. 소득 격차, 물가 상승 등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잠재돼 있던 시민들의 불만이 프랑스 시위를 기폭제 삼아 터져 나온 셈이다. 문종현(경상국립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는 “이번 시위에서 고등학생을 비롯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정부에 자신들의 요구를 전달하고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시위의 출발은 2018년 ‘노란 조끼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기후 변화 대응을 명분으로 유류세 인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자동차를 주요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는 프랑스 시민들과 저소득 노동자들은 세금 인상이 생계 부담을 키운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결국 2018년 11월, 노란 조끼를 입은 시민들이 시위에 나섰다. 유류세 인상 반대에서 출발한 시위는 이내 물가 상승과 소득 불평등,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을 표출하는 시위로 번졌다.
당시 시위는 정부의 정책 철회까지 이끌어냈다. 프랑스 정부는 시위가 거세지자 유류세 인상 계획을 철회하고 최저임금 인상과 세금 부담 완화 등을 연달아 발표했다. 그러나 정부에 누적된 시민들의 불만은 이후에도 크고 작은 시위 등으로 이어졌으며, 이번 시위에서 다시금 드러났다. 교사 부족과 노후화된 학교 시설, 지역 간 교육격차에 항의하며 시작된 학생들의 움직임은 공공서비스 전체에 대한 불만으로 번졌다. 과거 노란 조끼 운동이 생활비 부담을 계기로 정부의 정책 전반에 대한 반발로 번졌다면 이번 시위는 교육 현장의 문제를 통해 프랑스의 재정 체계 부담을 드러낸 셈이다. 김진영(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그간 프랑스의 시위에서는 특정 사안에 대한 불만이 거리로 표출되면 참여의 폭이 넓어지는 양상이 자주 나타나 왔다”고 전했다.
프랑스 학교 현장에서는 교원 부족과 과밀학급, 노후 시설 문제가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교육부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24~2025학년도 공립 중·고등학교 수업의 7.5% 이상은 교원 부재로 방치됐다. 일부 학교에서는 냉방시설이 부족해 대학 입학시험인 ‘바칼로레아’를 지하 주차장의 임시 시험장에서 치르기도 했다. 남성욱(숙명여자대학교) 석좌교수는 “프랑스 일부 학교에서는 쥐와 바퀴벌레가 나오고 천장에서 물이 새는 등 열악한 교육 환경이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위가 이어지면서 프랑스의 일상생활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일부 학교에서는 수업이 중단됐으며 대중교통 운행도 제한됐다. 루브르 박물관 등 관광·문화시설의 운영까지 영향을 받으면서 해외 관광객과 한국인 여행객, 유학생의 이동과 일정에도 불편이 발생했다. 현재 시위는 교육 문제를 넘어 공공서비스와 생활 문제로까지 확대되는 양상이다. 시위에는 고등학생뿐 아니라 대학생과 학부모, 교직원, 노동조합 등 다양한 집단이 참여했다. 프랑스 내무부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10월 24일 기준 시위 참여자는 약 41만 명으로 집계됐으며, 프랑스 전역에서 체포된 인원은 1,314명에 달했다.
이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시위에 대한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지난 22일 파리 엘리제궁에서 열린 치안 관계 부처 회의에서 마크롱 대통령은 그 어떤 시위 행위도 용납할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정부가 시위 통제 방안을 논의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이면서 정부와 시위대의 갈등도 이어지고 있다. 윤성욱(충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마크롱 정부는 정당한 요구와 폭력·파괴 행위를 구분한다는 입장”이라며 “일부 집회의 금지나 제한을 포함하는 정부의 조치가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관심이 집중된다”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시위는 벨기에와 이탈리아, 그리스 등 다른 유럽 국가로도 확산되고 있다. 지난 10월 26일 벨기에에서는 정부의 교육 예산 삭감과 열악한 교육 환경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가 일어나 대중교통과 학교 운영에 차질이 빚어졌다. 벨기에는 프랑스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이웃 국가다. 교육 환경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된 프랑스 학생들의 시위가 이들에게 도화선이 된 셈이다. 이외에도 이탈리아, 그리스, 포르투갈 등 프랑스와 인접한 국가들에서 생활비, 주거비 상승, 공공서비스 악화에 대한 불만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문 교수는 “프랑스 인근 국가들에서도 비슷한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공통된 불만을 지니는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시민들이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형국에서 ‘감당 가능성(Affordability)’이 이번 시위를 관통한다. 감당 가능성은 개인이나 정부가 특정 비용과 부담을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한다. 정부는 재정 부담을 줄여야 하지만 시민들은 생활에 필요한 공공서비스를 보장받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와 재정 여건 사이의 간극이 커지면서 불만이 시위로 이어졌다는 해석이다. 손동기(경상국립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유럽 국가들은 국민이 납부하는 세금보다 정부 지출이 빠르게 늘면서 국가부채와 이자 부담이 커지고 있다”며 “재정 여력이 줄어들면서 교육 현장에 필요한 투자를 확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럽 각국에서는 고령화와 국가부채 증가로 공공서비스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배분할지가 주요 정책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고령화로 연금과 의료 등 복지 지출이 늘어나는 가운데 국가부채까지 증가하면서 재정 운용의 부담이 가중된다. 글로벌 경제 데이터 플랫폼 ‘트레이딩 이코노믹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유럽연합(EU) 소속 국가들의 부채는 GDP 대비 81.5%에 달한다. 손 교수는 “유럽연합의 재정 문제는 단순한 재정 부족의 차원을 넘어 기존 산업과 노동력의 생존 여부와도 연결돼 있다”고 전했다.
공공서비스의 질을 유지하는 문제는 개별 정책을 넘어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도 연결된다. 프랑스뿐 아니라 벨기에와 이탈리아, 그리스 등에서도 교육과 공공서비스, 예산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시민들이 일상에서 체감하는 공공서비스의 질이 낮아지면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도 커진다. 공공서비스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이 국가 재정 운용에서 중요한 과제로 꼽히는 이유다. 김 교수는 “교육이나 의료 지출을 줄여 당장의 재정을 개선하더라도,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면 장기적으로 더 큰 사회적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며 “공공서비스의 수준과 부담 사이에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에서도 감당 가능성을 둘러싼 논의가 사회적 화두로 대두된다. 공교육의 역할과 의료비와 주거비 등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비용이 점점 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교육부가 발표한 「2024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에 따르면 국내 사교육비 총액은 약 29조 원으로 전년 대비 7.7% 증가했다. 공교육만으로 교육 수요를 충족하기 어려워지면서 사교육에 의존하는 가정의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고 있다. 이처럼 교육과 주거 등 필수적인 생활 영역에서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늘어나면서 국가의 공공서비스 보장 정도에 대한 논의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시위는 공공서비스 개선 요구가 사회 전반의 불만과 결합하게 되면 시위가 장기화되며 참여 집단도 확대될 수 있다는 사례로 남을 전망이다. 처음에는 학교 현장의 문제에서 출발했지만 대학생과 학부모, 교직원, 노동조합 등이 합류하면서 요구가 다양해졌다. 교육 환경에 대한 불만이 생활비와 주거비, 정부 재정 정책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진 것이다. 김 교수는 “이번 시위는 특정 법안의 철회나 정책 변경처럼 하나의 정치적 결단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교육 격차에서 나아가 저출생과 고령화에 따른 재정 부담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세대 간 부담을 공정하게 나누고 교육·의료 등 필수 공공서비스의 질을 유지하는 것이 골자다. 현재 세대의 재정 부담 뿐 아니라 미래세대가 누릴 기회와 복지 수준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윤 교수는 “미래세대가 짊어질 재정 부담도 고려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재정 구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유럽 국가들의 재정 갈등은 한국에도 교육·의료 등 필수 공공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한 재원 확보가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재정 지출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비용을 줄이는 데 집중하면 지역별 교육 수요와 의료 접근성 등 필수 공공서비스의 질이 낮아질 수 있다.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면서도 지역별 수요와 정책 효과를 함께 고려하는 재원 배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윤 교수는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면서 공공서비스의 질을 유지하는 방법은 전 세계가 안고 있는 숙제”라며 “복지의 제공과 거둬들이는 세금 간 간극을 조절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역설했다.
청년과 학생의 불만을 일시적인 반발로 여기지 않고 정책에 반영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프랑스 시위는 교육환경과 생활비 등 청년들이 일상에서 겪는 문제가 사회적 갈등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도 취업과 주거 불안, 교육격차 등 청년층이 겪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실제 영향을 받는 청년과 학생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는 뜻이다. 남 교수는 “학생들이 교육과 관련된 정책 결정 과정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