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이야기> 도심 속 한옥, 최순우 옛집 (한성대신문, 522호)

    • 입력 2017-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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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0-01-10 10:17

최순우 옛집은 미술사학자인 혜곡 최순우가 1976년부터 서거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유명한 그는 논문, 에세이 등 약 600편의 글을 남긴 미술사학자다. 강진에서 고려청자 가마터를 발굴해 학계에 큰 파장을 불러온 그는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으로 취임했다. 또한 그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던 70년대에 ‘한국미술 5000년전(展)’ 등 해외순회전시를 열어 우리나라 문화재의 정체성과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에 건축된 근대식 한옥으로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바깥채가 맞물린 ‘튼 ㅁ자형 구조’로 건축되었다. 이는 서울과 경기지방에서 대중적이었던 형태인데 안채는 사랑방, 안방, 대청마루, 건넌방으로, 바깥채는 서고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방은 최순우가 글을 쓰고 생활했던 방이고 안방은 그의 아내가, 건넌방은 딸이 사용했던 방이다.
최순우는 남다른 안목을 가지고 집안 이곳저곳에 한국적 아름다움을 남기기도 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현판이다. 그는 사랑방 문 위에 두 개의 현판을 달았는데, 앞뜰 쪽 현판에는 자필로 ‘杜門卽是深山(두문즉시심산)’이라는 글을 새겼다. 이는 ‘문을 닫으니 이 안이 곧 깊은 산중이다’라는 뜻으로 집안에서만큼은 편안하게 지내려는 마음을 담았다. 뒤뜰 쪽 현판에는 단원 김홍도의 글씨를 판각해서 ‘吾守堂(오수당)’이라는 글을 새겼다. 이는 ‘낮잠 자는 방’을 뜻하는데 ‘오수’는 훗날 그의 별호가 되기도 했다.
두 번째는 안채 미닫이의 창살이다. 이 창살은 쓸 용(用)자를 닮아 ‘용자살’이라고 불리는데, 그는 이를 두고 “쾌적한 비례의 아름다움을 갖추었으며 면의 분할에서 오는 쾌적한 시각의 아름다움으로는 몬드리안의 그것을 뛰어넘는다”고 했다.
세 번째는 앞뜰과 뒤뜰을 가득 메운 꽃과 나무다. 그는 소나무, 단풍나무, 매화, 진달래 등 우리나라 산과 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꽃과 나무를 뜰에 심었다. 해외순회를 다니면서 화려한 서양 꽃나무에 관심을 가질 만도 한데 우리 것만을 고집한 모습에서 그의 ‘우리 것’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 집은 최순우가 사망하고 나서 2002년까지 그 가족들이 거주하다가 재개발이 시작되며 부동산에 매각됐다. 하지만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시민들이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확보하여 영구히 보전하는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에 참여하면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시민들이 자발적인 모금을 통해 이 집을 매입한 것이다. 현재 최순우 옛집은 무료로 개방하여 시민들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히 봄·가을에는 문화행사를 진행하는데, 5월에 열리는 시민축제에는 우리학교 클래식기타 동아리 ‘한음’도 참가할 예정이다.

안에서 바라본 최순우 옛집의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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