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만한 법> 애인 사이에도 ‘성적자기결정권’이 있다 (한성대신문, 514호)

    • 입력 2016-08-30 17:25
명시적 동의 없다면 연인사이도 ‘성폭력’ 해당

청춘 남녀가 만나서 토론하고 술 마시고 여행을 떠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같은 과나 동아리별로 모꼬지(엠티)나 수련회를 가는 것도 대학생들만의 특권이다. 그런데 이런 모임에서 가끔씩 불상사가 일어난다. 바로 성폭력이다.
몇 년 전 의대생 3명이 같은 과 여자 동기생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사건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다. 재판 결과 남학생들은 한 펜션에서 함께 술을 마시다 술에 취한 여학생을 돌아가며 성추행하고, 카메라로 신체를 찍기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행에서 한 방에 묵게 된 동기들 사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예상하긴 어려웠다.
가해 학생들은 특수준강제추행, 성폭력처벌법(카메라등 이용촬영)위반으로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되었다. 법원은 이들은 같은 과 친구들로서 6년간 친밀한 관계로 지내왔는데, 피해자가 이 사건으로 큰 정신적 충격을 받고 상당한 성적 수치심과 배신감을 느꼈을 것으로 보이며, 고통스럽고 불안한 생활을 하게 됐다면서 피해자가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에 시달리는 등 2차 피해까지 겪고 있어서 엄중히 처벌할 필요가 있다고 판결했다.
명백한 성폭행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이른바 왕게임을 알고 있으리라. 게임에서 이긴 사람이 왕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왕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하고 거부하면 벌주를 마시는 게임이다. 여럿이 모였을 때 분위기를 돋우는 데 제격인 놀이지만 왕게임도 범죄에 악용되는 사례가 종종 있다.
동네 선후배 사이인 A씨와 B씨는 우연히 한 여학생을 알게 됐다. A씨는 여학생을 성폭행하기 위해 후배인 B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두 사람은 미리 짜고 왕게임을 하면서 여학생에게 어려운 조건을 내걸어 술을 계속 마시게 했다. 3시간이 지나자 여학생은 만취상태가 되었고, A씨는 몹쓸 짓을 하고 말았다.
당연히 둘은 법의 심판을 받게 됐다. 손쉽게 성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게임을 구실로 피해자가 술에 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A씨는 의도적으로 술을 먹인데다 후배에게 도움까지 요청했으므로 죄질이 무겁다. 특수준강간에 해당한다. 흉기 등을 사용하거나 2명 이상이 범죄를 하면 법에서는 특수라는 이름을 붙여 가중처벌한다. 준강간이란 사람의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상태를 이용해 간음하는 것을 말한다. 폭행이나 협박으로 강간한 것과 똑같이 처벌받는다. 예를 들어 잠이 들거나 술에 취한 사람을 성폭행하면 준강간이나 준강제추행이 되는데 강간, 강제추행과 처벌 수위는 같다.
B씨는 직접 성폭행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다고 죄가 되지 않을까. 오산이다. A씨와 함께 피해자를 만취 상태로 만들어 성폭행하기로 미리 짜고 직접 실행에 옮겼으므로 똑같은 죄명으로 처벌된다. 다만 가담 정도가 낮기 때문에 형량은 낮아질 수 있다. A씨는 1심에서 징역 3, B씨는 징역 2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한편 지적능력이 떨어지는 정신지체 장애여성을 폭행 등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고 간음한 것도 중죄에 해당한다. 법원은 장애여성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더라도 정신장애를 주된 원인으로 한 항거불능상태를 이용한 성폭행으로 보아 강간이나 강제추행과 같은 형량으로 처벌한다.
그렇다면 연인사이에도 성폭행이 가능할까. 당연하다. 20대 남성 C씨는 동갑내기 애인 D씨가 최근에 만남을 거절하자 집 앞으로 찾아갔다. C씨는 자신의 차 안에서 D씨에게 계속 만나달라면서 입을 맞추고 신체 부위를 만졌다. 그 과정에서 경미한 상처를 입었는데 법원은 징역형을 선고했다. 애인 사이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고 그것을 넘어서면 범죄가 된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다. 최근 법원 판결의 추세는 연인은 물론 심지어는 부부 사이에도 성적자기결정권을 인정하고 있다.
성범죄 사건은 은밀한 속성 때문에 뚜렷한 물적 증거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동의 여부를 놓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상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건 법률적으로건 용납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올해 대학가에선 피해자의 영혼까지 상처를 주는 성폭력사건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김용국
(법원공무원, 법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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