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100년 전 그들의 외침을 듣다 (한성대신문, 542호)

    • 입력 2019-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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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19-10-14 16:25

3·1운동, 민족과 민중의 역사적 실체를 보여준 사건

"여러분 우리에겐 반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날, 유관순 열사가 태극기를 나눠 주며 외친 연설 중 일부다. 전 국민이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던 그때 그 시절,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던 만세 소리를 따라 100년 전으로 가보자.

변화의 바람이 불다

1910년대는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대대적인 국가 재편성이 진행됐다. 이 시기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국가 재편성의 중요한 원칙으로 제시됐다. 민족자결주의는 ‘각 민족은 다른 민족의 간섭에서 벗어나 스스로 정치적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는 당시 식민지·반식민지(형식적으로만 주권을 가진 독립국) 국가들에게 강력한 민족저항운동을 촉발시켰다. 민족자결주의는 3·1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일제는 우리나라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주창된 민족자결주의는 조선인들에게 민족이 주체적인 힘으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이기훈(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일제는 강압적인 통치만으로 조선인들의 저항을 억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3·1운동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설명했다.

소리칠 준비를 하다

1918년 말,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은 독립을 위한 초석을 다지기 위해 활발한 활동을 진행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들은 주로 국외에서 조직을 결성해 움직였고, 국제 사회에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상하이에서는 여운형, 김규식 등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해 활동했다. 이들은 1918년 11월에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는 등 꾸준히 외교활동을 이어갔다.

미국에는 1918년 12월, 안창호 등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가 있었다. 이 단체는 1919년 2월, 향후 조선의 완전 독립을 보장해달라는 내용을 담은 독립청원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일본에서는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가 도쿄의 YMCA회관에서 웅변대회를 가장해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만세 대장정을 치르다

1919년 2월 8일, 일본유학 중인 조선인 청년들이 모여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을 선언했다는 소식이 국내에 퍼졌다. 이후 개별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학생들은 민족대표 33인, 종교계와 합류해 3월에 펼칠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경성지법검사국문서』에는 1919년 2월 27일, 이종일 제국신문 사장이 경성에서 제작한 독립선언서가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각 교단 조직망을 통해 신속히 전국으로 전달됐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그리고 3월 1일, 이종일이 배포한 문서를 본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은 탑골공원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다.

이에 이 교수는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탑골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하기로 결정했지만, 선언식이 자칫 폭력 시위로 변할 것을 걱정해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며 “민족대표들은 그날 종로의 한 음식점으로 이동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뒤 일본경찰에게 체포됐다”고 설명했다.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들의 주도로 평안도·함경도·황해도의 주요 도시에 서도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3월 3일에는 고종의 장례식장에서, 3월 5일에는 남대문역 광장에서 만세운동이 열렸다. 고종의 장례식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한 지방 사람들이 귀향하면서 만세운동은 전국 주요 도시들로 번져나갔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초반의 3·1운동은 비폭력 투쟁이었다. 그러나 만세운동이 농촌까지 확산되자, 일제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재한선교사보고』에 따르면 조선인들은 조용하고 질서 있게 집회를 진행했으나, 일제 헌병 경찰들 이 물을 쏘아대거나 갈고리를 휘두르는 등 폭력을 자행했다고 한다. 시위대 안에서 부상자가 속출하자 군중들은 분노했고, 일제의 탄압에 점차 무력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시작된 독립운동은 그 해 12월까지 이어졌고, 이는 아시아와 중동 지역의 다른 나라 민족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은 일제가 통치방식을 바꾸는 계기로 작용했다. 기존에는 군대나 헌병 경찰이 무력을 행사하는 ‘무단통치’를 통해 우리나라를 통제했으나, 3·1운동 이후에는 ‘문화통치’로 전환했다. 겉으로는 조선인들을 존중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교묘하게 감시하고 탄압하는 통치방식이었다.

이 교수는 “3·1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뿐 아니라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한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라며 “민족이나 민중을 ‘관념’이 아닌 ‘실체’로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은 그다지 많지 않다. 3·1운동은 민족과 민중의 역사적 실체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정수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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