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이제는 빛날 때, 기초학문 ③ (한성대신문, 579호)

    • 입력 2022-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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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2-06-07 00:00

‘상경계열 우대’, ‘이공계열 우대’. 기업들이 내놓는 신입사원 채용공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격요건 중 하나다. 하지만 그중에 기초학문을 전공한 학생들을 우대해 채용한다는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초학문이란 응용학문의 밑바탕이 되는 학문으로, 주로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을 일컫는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기초학문이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별다른 충격을 안겨주지도 않는다. 이런 추세는 ‘지식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대학에서까지 예외가 아니다. <한성대신문>은 기초학문이 당면한 위기와 원인을 알아보고, 문제를 타개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3호에 걸쳐 기획 기사를 송고한다.

한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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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생태계에서 한국의 위치가 식민지인 이유는 학문의 자급자족을 이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지는 577호 「어두운 현실 아래, 기초학문 ①」과 578호 「현실과 이상의 괴리, 기초학문 ②」에서 기초학문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 알아보고 그 원인을 분석했다. 기초학문 전공은 학생들에게 선호되지 않으며 가장 큰 원인은 낮은 취업률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원인들이 기초학문을 낭떠러지로 밀어내고 있었다. 현재에 이르러 기초학문은 대학 내에 독립적인 학문이 아닌 응용학문 주변부에 위치한 ‘들러리’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기초학문은 이러한 예속의 사슬을 끊어내고 온전한 학문으로 독립할 수 있을까.

우선 점진적인 해결책으로 기초학문에 대한 인식 개선이 꼽힌다. 대학을 바라보는 시선과 기초학문을 판단하는 잣대를 재정립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논의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학계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기초학문이 현실사회의 문제와 연계돼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나가는 과정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박정하(성균관대학교 교양기초교육연구소) 소장은 “기초학문의 연구가 사회 문제 해결에 간접적으로 기여하는 바를 보여주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는 기초학문 진흥을 위한 토론회 개최 등의 방안이 제시되기도 한다. 인하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이예원(25) 씨는 “기초학문 부흥을 위한 토론회 개최 등은 현재 널리 퍼진 기초학문에 대한 오해 개선에 효과적일 것”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당면 과제로써 제기되는 기초학문과 응용학문의 양극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기초학문인 인문사회분야 학술연구와 응용학문인 이공분야 학술연구의 올 한해 배정 예산 차이는 총 약 2,400억 원 이상이다. 민경찬(연세대학교 수학과) 명예교수는 “기초학문에 대한 연구는 장기적 안목에서 일종의 ‘묻지마’ 연구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러한 환경이 조성될 때 호기심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실패가 이뤄지면서 창의적 연구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대학에 대한 정부 지원은 국가의 인재를 배출하고 연구 성과를 이룩하는 일에 대한 투자로 인식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정부 주도의 재정적 지원이 대학의 발을 묶어놓았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대학을 운영하는 자금을 지나치게 정부 지원금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한국 대학은 등록금과 국고보조금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작년 1월 8일 한국사학진흥재단이 발간한 「020년 사립대학재정통계연보」에는 사립대학의 2019년도 결산 결과가 담겨 있는데, 총 교비회계 수입 중 등록금이 53.7%, 국고보조금이 15.5%를 차지했다. 박 소장은 “대학의 재정적 토대는 고려되지 않은 채로 마구잡이로 대학 수가 증가하면서 결국 국가의 재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고착화됐다”며 “대학의 주요 수입이 등록금과 국가의 지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국가의 통제에 따르는 것은 대학이 생존하는 방식”이라고 전했다. 박일우(계명대학교 Tabula Rasa College) 교수는 “대학의 자율성을 회수하는 방향으로 정부의 재정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며 “대학의 자율이 사라진 지난 세월동안 우리나라의 고등교육의 수준은 저하됐다”고 비판했다.

재정 지원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는 반면, 현재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응하는 세밀한 정책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기초학문 연구를 이어나갈 수 있는 후속 세대 양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후속 세대 양성을 위해서는 대학의 연구 기능이 강해져야 하고, 이를 도맡는 대학원이 기능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연구 주제를 하달하는 방식이 아닌 연구자가 원하는 주제와 방식을 실행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전한다. 한국연구재단의 이사로 활동했던 손동현(우송대학교 교양대학) 학장은 “정부에서 지정하는 연구 주제가 많은 편인데, 연구비 조달을 위해서 이를 외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얼핏 보면 교수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연구를 주도하는 것이 실용적이지 않아 보이지만, 이편이 결국은 학문적 쓰임새가 더 크다”고 설명했다.

대학원의 운용 방식에 대해서도 여러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우선, 교수의 연구를 보조하는 ‘조교로서의 대학원생’은 사라져야 한다는 견해가 제시된다. 민 교수는 “앞으로는 교수의 연구를 지원하고 협업하는 역할을 대학원생이 감당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대학원 인원을 보완하기 위해 ‘공유’의 개념이 고개를 들고 있다. 개별 대학과 학과 내에서만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주위의 대학과 협력하는 방법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민 교수는 “기초학문이 캠퍼스 내에서, 그리고 교수 개인 중심으로 존재하는 폐쇄적인 상황이 위기를 초래했다”며 “공유의 개념이 도입된다면 기초학문의 교육과 연구 모두에서 질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대학원 외에도 별도의 기초학문 연구기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른다. 현재 기초학문 부흥을 위해 설립된 대학부설연구소에는 서울대학교의 인문학연구원, 경희대학교의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 영남대학교의 민족문화연구소 등이 있다. 이처럼 현재는 대체로 대학이 자체적으로 연구소를 부설하는 형국이지만, 외국의 사례를 참고해 국가가 대학 내에 연구소를 설립하는 방안이 고려될 수 있다는 논리다. 박 소장은 “현재도 교내 연구소를 지원하는 방식의 사업은 있어왔다”면서 “대학 내에 국가 주도의 연구소가 위치하는 미국 등의 사례를 참고해보면, 해당 모델은 국가와 대학, 양측의 인력이 모두 활용된다는 점에서 훨씬 유용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기초학문의 후속 세대를 길러내려면 학문을 깊이 전공할 학생과 사회로의 진출을 꿈꾸는 학생을 구분해 교육해야 한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기초학문 학부만 졸업해서는 전공 지식의 생산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 진출을 원하는 전공자에게는 별도의 커리큘럼이 갖춰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덧붙인다. 민 교수는 “대학은 교육 기관이므로 학생 중심으로 운영돼야 하며, 그에 따라 학생의 미래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라면서 “학문의 길을 가지 않을 학생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지원이 중시되며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교원 채용 형태도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기초학문 전공의 전임교수 비율을 보다 높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임교수란 해당 전공의 연구와 교육을 전적으로 수행하는 교수를 의미한다. 이외에 대학에는 겸임교수, 초빙교수 등의 다양한 교강사 형태가 존재하지만, 전임교수에 비해 업무 범위가 협소하다. 손 학장은 “기초학문 전공 교수자가 속한 교양 교육 과정 등에는 전임 교수가 별로 없다”며 현실을 전했다.

같은 맥락으로 학과 구조조정 개편 방향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있다. 비록 해당 학문의 학과는 사라지더라도 해당 학문을 가르칠 수 있는 교수 집단은 남아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된다. 학문 자체는 대학에서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대표적으로 철학과가 사라진 대학에 교양대학 등으로 철학과 교수들이 편입된 사례가 있다. 박 소장은 “현재 한국 대학에서 발생하는 학과 구조조정은 학문 자체를 삭제하는 쪽으로 가는 경우가 대다수기 때문에 문제”라며 “특정 학문의 교육자만 존치시킬 수 있다면 오히려 학문 간 경계가 사라져 학생들에게 융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형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 교수들의 반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손 학장은 “어떤 학문을 전공한 교수가 해당 학과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보다 깊은 수업을 제공하고 싶어 하는 것이 통념”이라며 “하지만 미국, 유럽 등의 사례를 살펴보면 학과의 칸막이가 명확하지 않은데, 외국의 경우가 학생이 다양한 공부를 하기에는 더 적합하다”고 전했다.

더불어 정부의 대학 평가가 대학과 학과의 특성을 고려해 전면적으로 개편돼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전언이다. 다만 이 사안은 별도의 기초 학문 대상 평가가 추가돼야 한다는 의견부터 정부 주도의 대학 평가 철폐까지 그 정도는 상이하다. 손 학장은 “기초학문 교육의 양과 질을 모두 따질 수 있는 항목이 필요하다”며 “현재 대학평가 방식은 설령 공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미적분과 물리학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이 없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부 주도의 대학 평가 철폐는 정부와 교육 현장의 미스매치를 지적하며 제기됐다. 박 교수는 “대학 평가는 학생을 비롯한 국민들이 해야 한다”며 “현재 대학을 평가하는 기관들이 교육 현장에 있는 교수들의 조언을 듣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전문가들은 다양한 해결책들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지적 선진국’으로의 도약은 어렵다고 경고한다. 과거 서양에서 다양한 학문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동아시아는 그 학문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수행했는데, 한국은 아직 수용자로서의 역할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다. 이웃나라 일본이 1980년 이후로 ‘학문의 자급자족’ 시스템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실제로 일본은 기초과학에서 노벨상을 휩쓰는 국가로 손꼽힌다. 손 학장은 “대학 교수 채용에 있어서도 외국 학위를 국내 학위보다 우대하는 풍토가 있는데, 외국에서 새로운 이론을 배울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라며 “한국은 경제적으로 급진적인 발전을 이뤄냈지만 그 토대가 되는 기초학문 이론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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