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066명. 지난해 학점은행제를 이용하기 위해 등록한 학습자 수다. 학점은행제는 평생교육을 위한 주요사업으로, 새로운 전공을 탐구하거나 자격증을 취득하려는 이들에게 열린 배움의 길을 제시해왔다. 제도가 시행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일각에서는 ‘배움’보다 ‘학위’를 얻기 위한 통로로 변질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학점은행제는 정규 대학 교육 밖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학습 경험을 인정해 누구나 평생교육의 기회를 이어가며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학점인정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국민의 평생학습권을 보장하고 정규 대학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한 대안 교육체제로 도입됐다. 고등학교 졸업자 또는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교육부로부터 승인받은 대학이나 평생교육시설 등의 교육훈련기관에서 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 박지숙(경일대학교 평생교육학부) 교수는 “학교 밖에서의 다양한 경험과 교육받은 내용을 학점으로 인정받게 된다면 평생학습사회를 만드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논의에서 시작된 제도”라고 설명했다.
학점은행제를 수강하는 학습자는 ‘평가인정 학습과정’을 이수한다. 이는 교육부가 인정한 정규 대학 수준의 학점은행제 전용 교육과정으로, 전공·교양·일반선택 과목 등이 포함된다. 상술한 교육훈련기관을 통해 해당 과정을 수강하면 학점이 인정된다.
학습자는 이수절차에 따라 교육부 장관이나 대학의 장 명의로 학위를 수여받는다. 총 80학점을 이수하면 전문학사 학위가 주어지고 총 140학점을 취득하면 학사학위가 부여된다. 이 안에서 학습자는 평가인정 학습과정과 자격증, 실습 등을 스스로 구성해 학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회복지학 학사학위를 목표로 하는 학습자는 교육훈련기관에서 사회복지개론·사회복지행정론 등 학습과정을 이수해 학점을 취득할 수 있다. 이후 건강가정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관련 자격 학점이 추가로 인정되며 사회복지 관련 기관에서의 현장실습도 학점으로 반영된다.
학점은행제를 통해 취득한 학위는 대학의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해 얻는 학위와 동일한 효력을 지닌다. 학점은행제를 활용하면 학위취득 뿐 아니라 이수한 과정에 따라 사회복지사 2급, 평생교육사 2·3급 등의 전문자격을 얻을 수 있다. 또한 국가기술자격 시험과 편입학 등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도 부여된다. 김대유(한국교육연구소) 부소장은 “학점은행제는 대학에서 인증되는 사항과 같이 학위를 취득하고 자격증을 이수받는다”며 “제도의 특성상 기존 대학의 과정보다 짧게 이수할 수 있다는 특징이 존재한다”고 전했다.
이렇듯 폭넓게 운영되는 학점은행제에서 평가인정 학습과정 설계가 중요하게 작용하지만 문제는 이를 지원하는 ‘학습플래너’의 전문성 부족이다. 원격교육을 실시하는 교육훈련기관 내에는 학습자가 희망하는 전공이나 자격을 체계적으로 안내해 주는 학습플래너가 존재한다. 그러나 일부 학습플래너가 제시한 교육과정이 부실해 학습자가 학점을 이수하지 못하거나 과정을 진행하는 중 소통 부재 등의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박 교수는 “학습플래너라고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교육훈련기관에 소속돼 근무하는 직원들을 말한다”며 “학습자는 수강료 개념으로 학습 플래너에게 돈을 지불하고도 오히려 피해를 입기도 한다”고 밝혔다.
일부 부실한 교육과정도 존재한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의 「학점은행제 학위취득자의 사회적 경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11.6%가 ‘교육내용의 질 강화 및 콘텐츠 다양화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학습자가 보다 전문적인 학습을 요구하더라도 그에 원하는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의 제재도 무의미하다. 수업 운영과 학습자 모집 등에 관해 문제가 발생할 경우 평가인정 학습과정을 상대로 벌점을 부과하지만 이는 실질적인 효과가 없다. 2024년 정성국(국민의힘) 의원실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0년부터 5년간 학점은행제를 운영하는 181개의 교육훈련기관이 벌점을 받았으나, 평가인정 취소는 단 2회 이뤄지는 것에 그쳤다.
학점은행제 교육훈련기관의 수도권 편중도 한계로 지적된다. 학점은행제 정보공시 홈페이지에 따르면 전국 380개중 187곳이 서울에 몰려 있으며 비수도권은 고작 116곳에 그쳤다. 특히 기술, 예능계 학원의 경우에는 서울에만 집중돼 있는 실정이다. 이는 평생교육의 균등한 기회 제공이라는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있다. 박 교수는 “서울과 같은 도시에는 교육받을 수 있는 곳이 많다”며 “아무리 원격으로 교육을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지방에서 공부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겐 어려움이 존재한다”고 전언했다.
학습플래너로 인한 문제가 만연하지만, 정부의 단속이 이뤄지지 않아 전문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서도 학습플래너로 인한 문제를 인지하고 있으나 안내문을 배포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실질적으로 제도 운영을 제한하거나 감독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부재하다는 이유에서다. 김 부소장은 “학점은행제는 각 기관의 상당한 자율성을 요구하기에 내부에서 이뤄지는 학습플래너 등의 사례를 제한하기엔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수업 평가의 부실은 평가 절차의 구조적 한계에서 비롯된다. 출석 수업의 경우 교육 콘텐츠보다는 수업 시설에 대한 기준만 엄격하게 적용되는 상황이다. 이에 더해 온라인 수업에서는 콘텐츠 평가가 이뤄지지만, 2023년 기준 264명의 평가위원이 3,263개의 원격수업 학습과정을 확인해야 한다. 한 과정 당 500분 이상에 달하는 교육 내용을 모두 세밀히 확인하기에는 물리적 한계가 뒤따른다.
현재 학점은행제 벌점을 부과하는 현행 제도의 기준이 단계별 학습과정에만 적용되는 점에 기인한다. 제재의 대상이 교육훈련기관 전체가 아니라 개별 학습과정으로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교육과정 운영에 반복적인 문제가 발생해도 기관 자체를 제도에서 배제시킬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하다.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는 “학습과정을 평가인정하고 있기에 기관을 제재하기 어렵다”며 “기관의 평가를 위해 어떤 지위를 부여할 것인지 등의 논의가 요구될 것”이라고 전했다.
수도권 편중의 근본 원인은 정부의 지원이 새로운 연구·교육 개발보다는 이미 교육 기반이 갖춰진 지역에 집중돼 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지역별 수요나 특성을 반영한 교육과정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한 채 획일적인 교육 제공 방식에 머무르고 있다. 그렇다보니 기관 운영자 입장에서도 지방으로 확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실정이다. 김 부소장은 “정부에서는 이러한 특화된 교육과정 수립의 필요성을 인지하지만 정책적으로 실현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학습플래너의 과실로 인한 학습자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전문성을 갖추지 않은 이들의 활동에는 제약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학습자의 학습 전반을 함께하며 책임지는 만큼 오히려 해를 끼치는 이들은 제한해야 한다는 견해다. 강 교수는 “학습플래너가 야기하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부연했다.
전문가들은 부실한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육훈련기관의 사전 평가 단계에서 개방적인 평가 방식이 도입돼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 시설 점검에 그치지 않고 교육훈련기관과의 소통을 통해 교육의 질을 높이고 개선 방향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는 의미다. 김 부소장은 “정부가 앞으로 학습과정 전반에 관해 소통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인식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각 수업과정별로만 벌점이 부과되는 현행 제도에 더해 정부가 교육훈련기관 전체를 직접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체제 구축이 필요하다는 방안도 제시된다. 개별 과정 단위의 제재를 넘어 기관 차원에서도 교육의 질을 점검하고 관리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정성국(국민의힘) 의원은 “현재는 벌점을 부과하더라도 긴장감 없이 점검되기에 낡은 규제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학점은행제가 지역의 특성과 연계해 운영될 수 있도록 개선해 지역 간 교육 격차를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방 대학 등과 연합해 비수도권 지역에도 다양한 학습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 산업과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 대학 중심의 확장 운영이 이뤄진다면 지역 맞춤형 교육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김 부소장은 “지금보다 학교 등과 같은 시설이 협력해 학습자들이 필요에 따라 자문을 구하고 현장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로 발전할 수 있길 바란다”고 밝혔다.
학점은행제는 도입 당시의 취지인 ‘평생교육의 실현’을 되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현재의 단순한 학위 취득 수단에서 벗어나, 학습자의 역량과 성장을 중심에 두고 배움이 일상과 이어지는 평생학습 체계로 재정립돼야 한다는 견해다. 김 부소장은 “배움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범위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조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