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人> 목소리로 나다움을 증명하다 (한성대신문, 614호)

    • 입력 2025-09-2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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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5-09-22 00:01

성우 심규혁

[사진 제공 : 심규혁]

작품활동

•애니메이션 <원피스> ‘헤르메포’ 역

•애니메이션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미도리야 이즈쿠’ 역

•애니메이션 <하이큐!!> ‘카게야마 토비오’ 역

• 영화 <날씨의 아이> ‘모리시마 호다카’ 역

•영화 <알라딘> ‘알라딘’ 역

•영화 <웡카> ‘윌리 웡카’ 역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 ‘에코’ 역

•게임 <원신> ‘소’ 역

많은 사람은 성우를 ‘타고난 목소리’가 전부인 직업이라 생각한다. 독보적인 음색이나 개성을 지닌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수많은 오디션과 경쟁을 뚫고 마이크 앞에 서기까지 처음부터 완성된 목소리를 지닌 사람은 없다. 누구나 처음엔 대본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 흔들린다.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 색을 지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도 태반이다.

이 불확실한 길 위에서 자신만의 색을 찾아낸 인물이 있다. 애니메이션과 영화, 게임 등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해 온 성우 심규혁(43)이다. 그는 처음엔 목소리 톤을 낮추려 애썼지만, 자신을 숨기려는 행보로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지금 그는 성우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목소리와 글이라는 두 매체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그렇게 목소리로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고 글로는 세계를 빚어내며 남이 기대하는 모습이 아닌 자신다운 태도로 삶을 개척해 온 그의 여정을 지금부터 함께 따라가 보자.

목소리의 씨앗이 틔어난 순간

심 성우가 성우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시기는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우연히 마주한 학내 방송국 신입 부원 모집 포스터를 보고 아나운서부에 지원했다. 그곳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하며 주변으로부터 목소리가 좋다는 칭찬을 받았다. 또한 어린 시절 자주 접했던 더빙 영화 속 성우들의 목소리도 떠올랐다. 자신의 기억과 경험이 맞물리며 그는 점차 성우라는 직업을 꿈꾸게 됐다.

“처음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했어요. 그러다 방송국 모집 포스터를 보고 아나운서부에 지원했죠. 어릴 적 성우의 목소리에 익숙했던 기억 덕분에 목소리를 내는 일이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아나운서로 활동하다 보니 대본을 목소리로 살려내는 과정이 무척 흥미로웠어요. 아나운서는 많은 카메라 앞에서 뉴스를 진행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성우라는 직업을 생각하게 됐어요.”

감정의 조각을 수집하다

심 성우는 대학 졸업 후 곧장 서울로 상경해 성우 준비에 나섰다. 성우라는 직업에 매혹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린 결단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연기 기초부터 하나씩 쌓아가며 성우 공채 시험에도 도전했다. 약 3년 반 동안 성우 공채 시험을 봤고 9번의 도전 끝에 대원방송 성우극회 2기에 입단했다.

“성우 학원에서 말투에 따라 캐릭터가 달라 보이는 법, 감정을 목소리로 생생히 표현하는 법 등을 배우며 더욱 성우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어요. 수업을 들을수록 진로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공채 시험에도 계속 도전하게 됐죠. 준비를 시작한 지 2년이 넘었을 무렵엔 두려움도 컸어요. 그래도 꼭 성우가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끝까지 버텼어요.”

성우 공채 시험에 합격한 심 성우는 <원피스>, <유희왕>, <드래곤볼> 등 다양한 작품의 조연을 맡으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연기 과정에서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했다. 중후한 목소리를 가진 성우들에 비해 자신의 앳된 목소리가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다. 캐릭터에 어울리기 위해 억지로 목소리를 낮추고 말투를 바꾸려 애쓰다 보니 점차 자신만의 색이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위적인 연기라는 이유로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억지로 다른 사람이 되려 하다 보면 목소리에 감정이 실리지 않더라고요. 캐릭터를 연기하는 거지 나를 연기하는 건 아니니까요. 진짜 캐릭터처럼 보이지도 않았죠. 그렇게 하다 보니 제 자신도 연기에 몰입하지 못했어요. 대사 하나하나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흉내만 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게 연기 전반에 그대로 드러났던 것 같아요.”

이러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그는 곧 그런 방식으로는 좋은 연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캐릭터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자신을 바꾸기보다는 본래의 색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받아들인 것이다. 이후 그는 자신의 높은 음색이 주는 청량하고 생동감 있는 느낌을 강점으로 삼아 소년과 청소년 역할에 집중했다. 맑고 탄력 있는 목소리로 캐릭터의 활기와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하며 점차 자신만의 개성 있는 목소리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톤을 바꾸려 애쓰는 대신 제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했어요. 그러니 대사에 감정을 실을 때 훨씬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었고 캐릭터를 연기할 때도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생겼죠. 점차 ‘이게 나만의 색이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고 그때부터 비로소 진정한 연기를 할 수 있게 됐어요.”

▲애니메이션 <하이큐!!>의 ‘카게야마 토비오’(좌) [사진 제공 : 에스엠지홀딩스]



대원방송 성우극회에서 2년간 경험을 쌓은 뒤 심 성우는 프리랜서로 전향하며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애니메이션 <하이큐!!>의 ‘카게야마 토비오’, 영화 <웡카>의 ‘윌리 웡카’,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에코’ 등 다양한 작품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했다. 그는 자신의 색을 살리면서도 조연과 주연을 가리지 않고 폭넓게 배역을 맡기 시작했다. 또한 팬들의 지원 덕분에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이하 히로아카)의 ‘미도리야 이즈쿠’ 역을 맡으며 본격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히로아카는 제게 시리즈 주인공을 맡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작품이에요. 미도리야 역은 애니메이션 팬들의 투표로 결정돼 제가 맡게 된 배역이었죠. 미도리야 이즈쿠는 재능이 없는 캐릭터였지만 끝없는 노력으로 히어로의 길을 걷는 소년이에요. 보통은 오디션으로 배역이 정해지지만 미도리야는 팬들의 선택으로 주어진 역할이라 더욱 뜻깊게 느껴졌어요.”

그는 성우라는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작가로서도 활동을 넓혀갔다. 2022년에는『 목소리가 하는 일』을, 2024년에는『 너의 목소리가 세상에 울려 퍼지도록』이라는 자신의 성우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수필을 잇달아 출간했다. 그에게 글쓰기는 감정과 태도를 전한다는 점에서 목소리와 맞닿아 있다. 목소리로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듯, 글쓰기를 통해서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듯한 감각을 느꼈던 것이다.

“연기를 통해 캐릭터의 감정을 전하듯 글을 통해서는 제 생각과 이야기를 더 직접적이고 솔직하게 전달할 수 있더라고요. 한 줄 한 줄 써 내려가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 숨을 불어넣는 과정이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죠. 목소리로 생명을 불어넣는 일과는 또 다른 성취감을 주는 일로 다가왔어요.”

앞으로도 심 성우는 성우와 작가라는 두 길을 병행할 계획이다. 그는 목소리와 글이라는 서로 다른 매체를 통해 한층 다채롭고 입체적인 창작자가 되고자 한다. 그는 이 두 영역을 오가며 자신만의 서사를 구축해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성우로서 더 많은 감정을 표현하고, 작가로서 더 깊은 이야기를 전하며 두 영역을 동시에 성장시키고 싶어요. 두 길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저만의 색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줄 거라 믿어요. 목소리와 글이 만나면 더 큰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목소리로 그려내는 자화상

심 성우는 목소리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말투·억양·단어 선택 등 사소해 보이는 요소 속에 한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스며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진짜 자신을 드러내려면 먼저 스스로의 언어 습관과 태도를 돌아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고 관계를 맺는 방식을 성찰하는 일이기도 하다.

“요즘은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게 중요한 시대라고 생각해요. 남들이 기대하는 모습에 맞추기보다 스스로의 언어 습관과 말투, 태도를 차근차근 돌아보는 게 필요하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이게 나답다’는 확신이 생기더라고요. 그렇게 발견한 자신만의 색깔을 통해 말하는 일도 즐거워지며 진심이 더욱 효과적으로 전해진다고 믿어요.”

나아가 그는 자신만의 색을 찾기 위해선 타인과의 비교를 멈추고 일상에서 자신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과 반응을 세심히 관찰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흉내 내기보다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가장 몰입하고 즐거움을 느끼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곧 개성을 발견하는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그는 작은 습관이나 말버릇, 말할 때의 리듬 같은 사소한 부분에도 ‘자기다움’이 스며 있다고 강조한다.

“저는 나다움을 찾는 방법이 거창한 목표를 세우는 데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하루하루의 말과 행동 속에서 ‘이게 진짜 나다운 모습인가?’를 스스로 묻는 과정이 중요하죠. 그런 질문을 계속 던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안에 있는 고유한 색을 발견하게 되고 그 색이 결국 나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언어가 된다고 믿어요.”

박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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