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송> 구조화된 침묵이 허물어질 그날을 기다리며 (한성대신문, 615호)

    • 입력 2025-10-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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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5-10-20 00:00

청년의 목소리가 정책 결정의 현장에 스며들지 못하는 뼈저린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국정감사 결과, 전체 정부 부처 가운데 각 부처의 자문 역할을 맡는 정부위원회의 청년위원 비율이 10%에 미치지 못하는 곳이 절반을 넘는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특별시와 청년정책을 주로 다루는 위원회일 경우 청년 위원을 10% 이상 둘 것을 의무화했음에도 현실에선 반영되지 않는 씁쓸한 모습이다.

청년의 정치참여 부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방의회나 정당 등 각종 공공기관에서도 청년은 극히 소수에 머물러, 희미한 발언으로 존재를 드러낼 뿐이다. 대학 내 학생자치기구의 선출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여러 대학이 후보 기근과 낮은 투표율로 대표 선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청년 개인의 탓만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회 전반이 정치적 사고력을 기를 수 있는 구조를 허락하지 않으며 ‘침묵의 구조화’를 고착시켰기 때문이다. 정치는 단순히 정당이나 선거를 의미하지 않는다. 공동체 안에서 자원의 분배와 의사결정,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모든 장면이 곧 정치다. 선택이 일어나는 곳에 언제나 정치성이 따라붙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청년은 그 경계 밖에서 ‘정치적으로 말할 수 없는 존재’로 길러져 왔다.

학문의 자유를 가치로 내건 대학조차 정치 앞에선 유난히 조용하다. 학칙을 통해 집회·시위·집단적 결사 등의 정치적 의견 표출 행위를 금지하며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제약하고 학생활동이 총장의 승인을 받아 진행할 수 있음이 명시돼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학생활동은 사회 쟁점을 논의하고 서로의 입장을 조율하는 민주적인 토론의 씨앗으로, 대학 공동체의 자율성과 성숙한 시민의식을 길러내는 출발점이 된다. 그동안 대학은 건강한 토양을 만들어 씨앗이 스스로 자라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라기도 전에 싹을 자르는 것이 능사라 여겨온 건 아닐까.

물론 “대학이 무엇이기에 정치 참여까지 보장해야 하느냐”는 물음이 뒤따를 수 있다. 대학은 지식을 사유로 전환하는 사회적 성찰의 장이라고 답하고 싶다. 공공의 문제를 인식하고 의견을 나누는 열린 공간이라는 의미다. 대학이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는 순간, 학문은 현실과 단절되고 공유와 성찰의 기능을 잃은 채 스스로 뿌리를 잘라내는 셈이 된다.

한 사람의 질문, 한 번의 토론, 한 차례의 공론장이 축적될 때 그것은 침묵을 깨는 촉매가 된다. 그 촉매는 소란이 아니라 훈련된 사유와 책임 있는 발화를 낳고, 학생은 공동체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시민으로 자라난다. 변화의 씨앗이 대학 안에서 움트길 바라며, 그곳이 침묵을 깨는 ‘첫 번째 촉매’로 피어오를 그날을 기다려본다.

이승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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