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중박)의 시대가 왔다. 신성하게만 느껴지던 문화유산이 이제 우리 앞에서 살아 움직인다. 국중박에서 반가사유상을 보며 잠시 멈춰 사유하거나 VR로 삼층석탑 근처를 걸어보며 ‘뮷즈’를 사는 등 체험이 소비까지 이어진다. 개인이 만든 소반, 자개 스티커로 꾸민 텀블러 하나하나가 전통을 나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만드는 재미가 된다. 전통문화는 세대를 넘어 전해지고 살아 있는 가치가 된다. 진열장 속 문화유산이 ‘힙’해진 지금, 과거와 현재를 잇는 국중박에 대해 파헤쳐 보자.
임지민 기자
국중박, 청년을 사로잡다
최근 국중박이 청년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로 주목받고 있다. 올해 정연욱(국민의힘) 의원실이 국중박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5년 국중박 누적 방문객 수는 500만 명을 돌파하며 세계 5위 수준으로 자리 잡았다. 기자가 방문한 평일에도 개관 시간 이전부터 박물관 앞은 관람객으로 빼곡했다. 평택대학교 광고홍보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우시은 학생은 “국중박 줄이 너무 길어서 대부분 개관 몇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해 있다”고 전했다.
국중박이 이토록 인기를 끌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국중박은 단순한 학습의 공간을 넘어 몸소 체험하며 역사와 예술을 직접 느끼는 장으로 탈바꿈했다. 전시관을 채우는 빛과 음향, 공간의 구조는 문화유산에 ‘스토리’를 더하며 관람객에게 시대를 넘나드는 생생한 경험을 선사한다. 이종욱(한국전통문화대학원 디지털헤리티지학과) 교수는 “국중박의 전시 공간은 관람객의 오감과 감정을 동시에 자극하며 문화유산과 현재를 연결하는 예술적인 체험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청년을 중심으로 ‘힙트래디션(Hip-tradition)’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힙트래디션은 감각적임을 뜻하는 힙(hip)과 전통을 뜻하는 트래디션(tradition)이 합쳐진 단어로, 전통을 세련된 감각으로 재해석해 즐기는 문화 태도를 뜻한다. 과거의 문화유산을 그저 보존의 대상으로 두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조형미나 색감, 이야기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흐름이다. 청년은 전통을 먼 옛날이야기로 보지 않고 멋진 디자인과 시대를 넘어서는 아름다움으로 생각한다. 최소영(문화역서울284) 국가유산해설사는 “전통이 과거의 유산으로만 머물지 않고 현대 문화의 일부로 확장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신으로 전시에 몰입하다
국중박의 전시는 단순 관람을 넘어 몰입형 전시 형태로 나아갔다. 몰입형 전시는 빛·소리·영상·향기·움직임 등을 활용해 관람객의 모든 감각을 자극함으로써 작품 세계에 깊이 몰입하도록 구성된 전시 형식이다. 이러한 전시는 공간 전체를 하나의 감상 공간으로 구성한다. 전시장 벽에 큰 화면을 투사하고 음악과 조명을 장면의 전환에 맞춰 조정한다. 음악이 느려지면 조명이 어두워지고 속도가 빨라지면 밝아지며 전체 분위기를 통일감 있게 만든다. 김시범(국립안동대학교 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 교수는 “관람객이 자유롭게 이동하며 관람을 진행하도록 설계돼 있어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된다”고 설명했다.
개관 후 4년째 국중박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시실인 사유의 방에서 관람객은 몰입의 경험을 체감한다. 넓은 원형 공간의 한가운데, 단 두 점의 반가사유상이 놓여 있다. 어둑한 조명이 드리운 공간 한가운데 두 줄기의 빛이 반가사유상만을 비춘다. 그 빛 아래 반가사유상이 고요히 모습을 드러내면 관람객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집중된다. 오직 시각에만 집중해 다른 감각의 자극을 최소화함으로써 관람객은 외부 환경보다 작품과 자신의 내적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그 결과 각자의 고유한 사유와 마주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이 교수는 “사유의 방은 관람객이 공간 자체와 문화유산을 함께 느끼도록 설계돼 단순 관람을 넘어 몰입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라고 덧붙였다.
국중박의 디지털 실감 영상관은 관람객의 눈과 귀를 통해 평면적인 회화 속 장면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관람객은 시청각적인 자극을 받고 마치 조선시대 궁궐 한복판에 서 있는 것처럼 당시의 역사 현장을 체험하게 된다. 초대형 미디어 스크린은 사방과 바닥까지 5면을 가득 채우며, 회화가 살아 움직이고 음향이 공간을 완전히 감싸 관객을 둘러싼다. 안양대학교 영미언어문화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황채원 학생은 “디지털 실감 영상관에서는 그림 속 장면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을 받았다”며 “소리와 색이 맞물려 전통 작품을 온전히 향유하는 경험을 했다”고 밝혔다.
체험은 시간의 경계를 허물었다
관람객은 국중박의 체험형 전시를 통해 과거의 문화유산과 미감을 현대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체험형 전시란 관람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해 전시 주제와 내용을 직접 느끼고 이해하도록 설계된 전시 형태다. 덕분에 청년은 옛 전통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그 안의 의미를 살려 새롭게 풀어낸다. 이를 통해 관람자는 단순한 관람을 넘어 전통문화의 맥락과 의미를 직접 체험하며 이해할 수 있다. 이 교수는 “청년은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다양한 방식으로 문화를 즐긴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청년은 전시에 직접 참여하며 우리의 고유문화를 체험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국중박에서 관람객은 ‘나만의 황금 문화유산 만들기’를 통해 금제 장신구를 관람한 뒤 디지털 화면에서 스크린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 자신만의 디자인을 완성할 수 있다. 청년은 문화유산을 재현하거나 디지털로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전통의 미감을 스스로 탐색한다. 김 교수는 “청년은 역사 속 흔적을 경험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통의 아름다움을 해석한다”고 전했다.
VR 체험관에서는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같은 건축물을 360도로 둘러보며 가상 공간 속에서 시대를 넘나드는 경험을 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비대면 환경과 새로운 기술 적응에 익숙한 청년 세대 특성상 VR은 이미 일상 속 놀이이자 콘텐츠 소비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VR 게임이나 영상 등이 그 예다. 이 때문에 VR 체험관을 통해 만나는 전통 건축물 등은 청년에게 친숙하고 재미있게 다가온다. 마치 직접 방문한 것처럼 몰입하며 건축의 디테일과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전시관 곳곳에는 관람 후 직접 만져보도록 재현된 문화유산이 배치돼, 관람이 끝난 뒤에도 VR 속 움직임의 기억이 오래도록 이어진다. 우 학생은 “VR로 건축물을 둘러보고 문화유산을 직접 만져보니 그간 봐왔던 진열된 전시와 달리 전통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뮷즈, 오늘의 취향이 되다
전통을 체험하던 청년의 관심은 이제 소비까지 이어진다. 국중박 내 상품관에 자리한 ‘뮷즈(MU:DS)’가 그 대표 사례다. 뮷즈는 뮤지엄(Museum)과 굿즈(Goods)의 합성어로 전시나 문화유산의 생김새를 활용해 제작된 박물관 상품이다. 실제로 국립박물관문화재단에 따르면 뮷즈의 올해 매출액은 300억 원을 돌파했다. 이제 단순히 문화유산에 몰입하고 체험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단청 무늬 스카프, 조선 궁중 램프, 반가사유상을 모티프로 한 미니 피규어까지 판매하고 있다. 청년은 전통문화유산을 현대적인 감각의 굿즈로 소비한다. 김 교수는 “뮷즈는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매개체로 작용해 청년의 구매 욕구를 이끌어낸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소비가 과거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청년의 ‘리메이크’ 성향과 맞물린 결과라고 분석한다. 청년은 이제 전통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손으로 직접 재현하며 창조의 과정 속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확장한다. 실제로 전통문화를 담은 굿즈를 직접 제작하거나 이를 재해석해 자신만의 감각으로 표현하는 모습이 일상에서 쉽게 발견된다. 더불어 역사를 품은 문화유산을 현대의 감각적인 디자인과 결합해 되살리는 이러한 시도는 일상 속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생활 속 소품에 옛 문화를 녹여내는 과정에서 청년은 전통을 손으로 만지고 바꾸며 그 안의 의미를 확장한다. 전통 굿즈를 제작·판매하는 조상명(쉘랑코리아) 대표는 “직접 만들어보니 전통이 어렵거나 멀게 느껴지기보다는 왜 예전 사람들이 이런 문양과 매듭을 썼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이 교수는 “리메이크를 통한 재창작은 전통과 현대를 연결하고 소비자에게 전통을 친근하게 만드는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변화는 리메이크된 문화유산인 뮷즈가 청년의 일상과 취향 속으로 스며든다는 걸 보여준다. 청년은 뮷즈에서 구매한 자개 스티커와 같은 전통 굿즈로 일상의 물건을 꾸미며 자신만의 색을 입힌다. 텀블러에 자개 스티커를 붙이거나 ‘나전소반 만들기 체험’ 세트를 이용해 작은 소반을 제작한다. 전통 나전소반을 현대의 찻잔 받침대나 액세서리 보관대로 사용하는 등 전통의 형태는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취향과 쓸모를 더한다. 김 교수는 “청년들의 재해석은 전통문화를 재현하고 변형함으로써 전통문화와 개인을 연결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고 말했다.
오늘의 국중박은 청년이 전통을 소비하며 세상에 다시 전파하는 주체가 되도록 이끈다. 자신이 만든 소반, 꾸민 텀블러, 디자인한 소품 하나하나가 청년의 개성과 창의적 표현을 담은 문화가 된다. 청년은 전통을 옛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삶과 연결된 가치로 느끼게 된다. 결국 전통문화는 세대를 넘어 퍼지며 청년은 자신만의 창의적인 방법으로 전통을 알리는 문화 전파자가 된다. 이 교수는 “국중박에서의 참여는 청년들에게 전통을 친근하고 실용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동시에 문화적 정체성과 창의적 표현을 강화한다”고 분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