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기자와 떠나는 문화여행> 당신의 삶을 선택할 수 없다면? (한성대신문, 564호)

    • 입력 2021-03-02 00:02
    • |
    • 수정 2021-03-02 00:02

<편집자주>

요즘 넷플릭스나 왓챠 같은 OTT 서비스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우리는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똑같은 생각을 갖지 않는다. 작품의 온전한 의미는 보는 사람에게 달려있다. 해석은 여러분의 몫이다. 나만의 해석을 찾기 위해, 문화 여행을 떠난다.

우리는 무수한 선택으로 각자의 삶을 만들어간다. 미래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매 순간 선택이 소중하다. 앞으로의 삶이 정해진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정해진 삶으로만 살아야 한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첫 여행지는 태어남과 동시에 운명이 결정되는 세상이다.

신혜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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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지 아닌지 운명을 결정하는 건 자신의 몫이잖아?"

많은 사람이 차례대로 회사에 들어간다. 출입에 사원증은 필요하지 않다. 모든 사람이 입구에 있는 게이트에서 채혈을 진행한다. 기계 위에 손가락을 올리면 몇 초 사이에 각자의 신분이 확인된다. 남자도 인파 속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출근하지만, 그의 손가락에는 가짜 피부가 붙어있다. 남자가 손가락을 올린 기계에서 초록색 불이 켜지고, 통과음이 울린다.

출근 후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한 남자는 초소형 진공청소기로 자판 사이를 청소한다. 주위 사람은 남자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깔끔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남자는 청소 후 소매 속에서 작은 병을 꺼낸다. 조심히 뚜껑을 연 남자는 하얀 가루를 자판 사이에 뿌린다. 서랍에서 빗을 꺼낸 남자는 머리카락이 들어있는 다른 병을 연다. 주위 시선을 살피고 빗에 머리카락을 걸어, 다시 서랍에 넣는다.

피 한 방울, 머리카락 한 올 혹은 피부조직 약간으로도 남자의 정체가 밝혀질 수 있다. 자신의 열등한 유전자 정보를 숨기기 위해, 남자는 매일 같이 몸을 닦고 청소한다.

영화 속 남자가 신분을 위조한 이유는 기회를 가지기 위해서다. 영화 속 세계는 유전자 편집이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곳이지만, 남자는 부모의 선택으로 유전자에 어떤 조작도 없이 태어난 인간이다. 그가 갖고 태어난 유전자는 우연의 산물이다. 그의 주변에는 편집된 유전자로 가득하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주변의 유전자를 빌려야만 한다.

능력보다 타고난 조건이 중요한 세상. 유전자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삶의 방식이 결정되는 세상. 영화 <가타카>가 보여주는 불평등의 부조리다.

▲신분 제공한 남자(아래)와 주인공(위)의 모습

태어나자마자 정해지는 삶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자본이 많을수록 유리하다.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평등 사회를 표방하는 정부가 들어섰지만, 자본으로 인한 격차까지는 해결하지 못했다. 문제는 자본에 의한 격차가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자본의 계급화를 두고 ‘수저론’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개인의 노력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에 따라서 인간의 계급이 나뉜다는 자조적인 표현의 신조어다.

개인 간의 격차가 선천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인간 사회의 부조리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지금의 현대 사회가 건설되기 전에는 혈통 등이 더 중요한 사회도 있었다. 현대 사회 역시 혈연, 지연 등 부모가 갖고 있던 인맥을 대물림하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아직도 이런 조건이 유효하다는 성토가 나오면서, 블라인드 면접과 인·적성 평가 등 사람을 평가하는 새로운 기준이 제시됐다. 블라인드 면접이란, 채용과정에서 출신지역, 학력, 가족관계 등 편견이 개입될 수 있는 정보를 보지 않는 면접을 말한다.

<가타카>가 제시하는 사회의 모습은 선천적인 조건을 더 극단적으로 추구한 형태다. 유전자는 출생의 제비뽑기를 통해 타고난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소재다. 심지어 영화에서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유전자를 삶에 유리한 형태로 편집한다.

고용노동부는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 실력과 인성이 사람을 뽑는 기준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실력이나 인성은 후천적으로 살면서 쌓아나가는 개념에 가깝다. 블라인드 채용 등 새로 등장한 평가 시스템은 우리의 삶이 선천적인 조건에 의해서 좌우됐을 때 개인이 느끼는 박탈감을 사회도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다.

▲주인공이 사용할 혈액을 뽑고 있는 모습

천편일률적인 삶

선천적인 조건으로 만들어진 기준만큼이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사회에 나와 있는 기준이 너무 적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천편일률’이라는 표현을 쓴다. 천 권의 책이 모두 한 가지 맥락으로 이뤄져있다는 뜻이다. 모두가 똑같은 기준으로 편집된다면 천 권의 책도 한 권의 책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삶에서 자유를 느끼는 이유는 우리의 행동에 따라 변화할 세계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사회가 과연 그런 기대를 줄 수 있을까? 만약 기준에 오류가 있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될까?

영화 속 세상은 삶의 유·불리를 나누는 기준이 유전자 하나뿐이다. 삶의 변수가 적은 걸 넘어서서 하나밖에 없는 극단적인 사회다. 남자는 다른 이의 신체조직을 모으고 사용하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영화를 보는 사람은 그 행동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우리는 영화 속 세계에서 도덕이나 윤리보다도 유전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체득하고 있다. 그는 도덕적이지 못한 인물이지만 인간적인 삶을 위해서 노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남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하나뿐이기 때문에 그 길이 부도덕하고 더러운 길이더라도 우리는 그 길을 인정한다.

사실 유전자는 심장질환, 신경계 질병, 우울증, 집중력 장애 등 살아가면서 질병이 발생할 가능성을 알려줄 뿐이다. 어떤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운명을 정해주지는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한 여자는 위장 취업한 남자와 함께 일하고 있다. 여자는 유전자 편집을 통해 태어났지만 심장질환을 가지게 됐다. 여자는 업무적으로 배제되긴 하지만 남자와 다르게 취업에서는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심장질환이 생길 가능성과 심장질환이 실제로 발행한 결과가 서로 교차하는 상황에서 영화 속 사회는 가능성을 악으로, 결과를 선으로 보고 있다. 하나 뿐인 기준을 정당화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아이러니다.

영화 <가타카>는 우리처럼 우연히 태어난 한 남자를 유전자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구성된 사회에 가두면서 이면의 부조리를 보여준다. 어쩌면 영화 속 사회는 우리 사회가 마주할 미래일지도 모른다. 편집된 우수한 유전자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 돌진하는 남자의 삶을 따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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