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4·19는 어떻게 혁명이 되었나 (한성대신문, 588호)

    • 입력 2023-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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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3-04-17 00:00
[사진 : 황서연 기자]

4·19혁명이 올해로 63주년을 맞았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민주화를 위한 숭고한 희생을 수도 없이 만나볼 수 있지만,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건은 4·19혁명이 유일하다. 혁명은 헌법을 벗어나 국가의 기초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을 말한다. 1960년 4월에는 어떤 일이 있었기에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이승만 전 대통령과 자유당은 영구 집권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애썼다. 2번에 걸친 헌법 개정을 통해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대통령선거 방식을 바꿨으며, 반정부 인사에 대한 폭력을 자행하기도 했다. 헌법에 기반한 질서를 무시하면서 종신 집권의 길을 닦아 나가는 행위에 그의 정권을 향한 국민의 불만이 커졌다.

1958년, 민의원*을 선출하는 ‘제4대 국회의원선거(이하 민의원 선거)’에서부터 민심은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을 떠났다. 선거를 앞두고 진보당의 당수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법살인’을 자행한, ‘진보당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조봉암은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때부터 이 전 대통령의 유력한 경쟁자였다. 또한 부통령에는 이미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당선된 상태였고,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개헌이 가능한 의석수인 154석을 확보해야 그들 마음대로 헌법을 고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여러 부정행위를 자행했음에도 자유당은 125석을 얻는 것에 그쳤다. 학자들은 비록 실패했지만 민의원 선거가 정권 붕괴의 가능성을 보여줘,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이 더 큰 부정행위를 기획하도록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고지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민의원 선거로 정권 연장에 대한 불안감을 느낀 이 전 대통령과 자유당이 3·15부정선거를 도모하기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1959년, 이 전 대통령은 1년 뒤 진행될 선거에서 자신의 대통령 연임과 자유당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 구체적인 부정선거 계획을 만들어 나갔다. 가장 먼저 1959년 3월, 자신의 ‘충복’이라 불리던 최인규를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최 장관을 필두로 각급 기관의 공무원과 경찰이 선거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공무원은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의 정책에 대해 선전하는 등 선거운동에 동원됐으며, 경찰은 6월 일부 지역에서만 진행된 재보궐선거를 ‘예행연습’ 삼아 선거 과정을 진두지휘하면서 민주당이 주최하는 선거유세나 집회는 허가해주지 않았다. 이에 더해 자유당은 ‘대한반공청년단’과 같은 관제 단체를 만들고, ‘정치깡패’를 해당 단체의 요직에 임명시켰다. 정치깡패란 정치세력에 무력을 제공하며 권력 유지에 도움을 주고 대가로 권력의 보호를 받으며 경제·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무리를 말한다. 이들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이 전 대통령과 자유당에 대한 비판을 억압시켰다.

동시에 이 전 대통령과 자유당은 ‘4할 사전투표’, ‘3인조·9인조 공개투표’와 같은 구체적인 부정 투표 방법까지 계획했다. 4할 사전투표란 총 유권자의 40%에 해당하는 자유당 표를 투표 개시 이전에 투표함에 넣어두는 방법이며, 3인조·9인조 공개투표는 3인 또는 9인씩 조를 짜서 조장이 자유당 후보에게 모든 조원이 투표했는지 확인한 후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는 방식이다.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이 이처럼 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계획하고 있는 동안, 자유당에 대항할 만한 유일한 정치세력이었던 민주당은 구파와 신파로 갈라져 심각한 내분을 겪고 있었다. 두 계파는 이 전 대통령에 대항할 후보를 지명하는 문제에서조차 이견을 보였다. 구파는 조병옥을, 신파는 장면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야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각각 주장했다. 결국 민주당은 내홍으로 인해 이 전 대통령과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대응하는 어떠한 계획도 수립하지 못했고, 11월이 돼서야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에, 장면을 부통령 후보에 지명했다. 고 선임연구원은 “민주당은 애초부터 ‘반이승만’에 동조한 여러 정치세력이 통합된 연합체의 성격을 띠었다”며 “이승만 정권의 전횡을 참을 수 없던 국민들의 선택을 통해 제1야당으로 부상했음에도 계파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고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은 민주당의 이러한 상황마저 부정선거의 성공에 활용하려 했다. 바로 선거일을 앞당기기로 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선거는 5월에 치러져야 했다. 그러나 12월에 이 전 대통령은 농번기를 피해 조기에 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민주당이 내분을 수습하고 선거전에 나설 준비도 채 하지 못했을 때 선거를 끝내버리기 위함이었다. 민주당은 강하게 반발했지만 1960년 2월, 결국 3월 15일로 선거일이 확정됐다.

이 전 대통령이 선거일을 앞당긴 데에 조병옥 후보의 병세가 연관돼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조 후보는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이후 꾸준히 건강이 악화됐으며, 1월에는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에 이른다. 김재원(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겸임교수는 “조 후보는 건강 문제로 인해 선거운동에 힘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며 “이 기회를 틈타 자유당과 이 전 대통령은 잽싸게 선거를 마무리하려 꼼수를 부린 것”이라고 말했다. 조 후보는 선거를 한 달 앞둔 채 사망했고, 민주당은 새로운 대통령 후보도 내놓지 못한 채 선거를 치러야만 했다. 대통령 후보가 이승만 한 사람으로 좁혀졌음에도 자유당은 부정선거 계획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이기붕 후보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서였다.

국민들은 이미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행해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민주당이 자유당을 통해 공무원과 경찰을 대상으로 배포된 선거대책 비밀 공문을 증거 삼아, 부정선거가 계획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정선거 계획으로 인해 국민들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부정 여론이 팽배한 상황에서,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2·28민주운동’이 벌어졌다. 2·28민주운동은 일요일인 2월 28일 대구에서 예정된 민주당의 선거유세에 고교생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강제로 등교시킨 일에 대한 항거였다. 전국 각지로 시위가 전파되면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선거일 이틀 전인 13일까지도 서울특별시의 고교생은 공명선거를 요구하며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이런 민심에도, 정부는 굴하지 않고 부정선거를 강행했다. 사전투표, 공개투표가 이어졌고 경찰과 대한반공청년단이 투표소를 장악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어 개표 결과는 이 전 대통령이 유효투표 수의 88.7%, 이기붕 후보는 79%를 득표한 것으로 발표됐는데, 이는 내무부에 의해 조작된 수치였고 이것을 그대로 믿는 국민은 없었다. 정부에서는 자유당 표가 100%를 넘기는 것은 아닐지 걱정하면서 각 지역 개표소에 자유당 표를 줄이라는 ‘감표’ 지시를 하달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선거 당일에는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제1차 마산시위’가 벌어졌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 ‘선거무효’ 등의 구호가 울려 퍼졌고, 경찰의 폭력적 진압 또한 계속됐다. 마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전국으로 뻗어 나갔으며, 결국 정부는 등교중지령까지 내렸다.

이미 전국이 분노로 덮힌 가운데, 4월 11일에는 국민의 반발심을 추동할 새로운 사건이 터졌다. 제1차 마산시위 당시 실종됐던 마산상업고등학교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중앙부둣가에 떠오른 것이다. 소식을 접한 마신시민들은 삽시간에 거리를 메웠고, 더 많은 시민이 더 격렬하게 저항했다.

마산에서 벌어진 2번의 시위는 ‘기폭제’ 역할을 했는데, 특히 대학생들의 집단적 움직임이 시작됐다.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가장 먼저 나섰다. 신입생 환영회를 빙자해 교내에서 집회를 열고 학교 밖으로 나가 가두시위를 진행했으며, 국회의사당 앞에서 농성을 벌이며 대통령과 내무부 장관의 부정선거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대 학생들은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복귀하던 도중, 100여 명의 정치깡패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해당 사건은 대서특필됐고, 더 많은 시민과 학생이 움직이기에 충분한 도화선이 됐다. 동국대학교,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등 서울시내 주요 대학의 학생들이 21일에 진행키로 한 집회가 19일로 앞당겨졌다. 국회의사당, 경무대 인근, 대법원 등 다양한 장소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오후부터는 고교생까지 참여하며 규모가 점점 커졌다. 시위가 여러 장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자, 결국 이 전 대통령은 서울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는 등 무력을 사용해 진압했는데, 그럼에도 시위는 더욱 격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일부 시위대가 무장을 하고 군경에 대항했으며, 친정부 언론사인 서울신문사 사옥과 대한반공청년단이 들어 있는 반공회관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대구, 경기도 인천시, 충청남도 대전시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전개됐다.

이 전 대통령은 이를 ‘일부 불순분자의 불평’ 정도로 생각했다. 20일 그가 발표한 담화에는 ‘애국적인 한국민으로서 어느 누구든지 그런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고 믿지 못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사과나 퇴진의 뜻은 밝히지 않았다. 그저 장관 등 국무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퇴로 무마시키려 했다. 하지만 시위는 잦아들지 않았고 이 전 대통령은 자유당 총재직을 내려 놓았으며,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는 당선인 신분에서 물러났다. 표면적으로는 일단락된 모양새였다.

▲민주당 진주시당 당사 앞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에게 제지당하는 당원 [사진 제공 : 3·15의거기념사업회]

▲마산의 할머니들이 재선거를 요구하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사진 제공 : 3·15의거기념사업회]

▲대학교수단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사진 제공 : 3·15의거기념사업회]

그러나 25일, 대학 교수진까지 시위에 나서며 정국은 다시금 새 국면을 맞았다. 교수들이 19일에 있었던 무수한 학생들의 희생을 지켜보기만 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다 결국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250여 명에 달하는 각 대학의 교수진은 서울대에 모여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요구’를 담은 시국선언문을 작성했다. 시국선언문이 완성되자마자 교수단은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교수단의 행렬에 학생과 시민들은 말없이 따라 나섰고, ‘이 대통령은 즉시 물러가라’는 구호가 온 도시를 울렸다. 김 교수는 “교수단의 시국선언문은 처음으로 이 전 대통령의 책임과 퇴진을 거론했다” 며 “구호가 ‘이승만 퇴진’으로 바뀐 것도 이때부터였다”고 설명했다.

이튿날까지 시위가 이어지자, 허정 외무부 장관의 주도로 대통령 하야 논의가 시작됐다. 결국 이 전 대통령은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하야 성명을 발표한다. 이후 국회에서는 이 전 대통령의 즉각 하야, 3·15 선거의 무효화 및 재선거 실시 등의 내용이 담긴 ‘시국수습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리고 27일, 이 전 대통령이 사임서를 제출하며 4·19혁명은 막을 내린다.

우리 현대사 속 민주화를 위한 노력들은 주로 대학생이나 고교생과 같은 학생의 손에서 일궈졌다. 4·19혁명 역시 학생의 역할이 컸지만, 도시의 빈민층과 무직자 등의 참여도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다양성을 갖는 혁명으로 평가된다. 또한 최초의 전국단위 민주화 운동으로, 이후 박정희 정부에서 벌어진 저항운동의 기원으로서 한국 현대사에 자리매김했다. 고 선임연구원은 “넝마주이나 초등학생,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이 참여했다”며 “4·19혁명은 국민들의 자발적 주권 행사의 출발로서, 민주주의 이행의 서막으로 기억될 수 있다”고 술회했다.

*민의원 : 1952년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구성된 입법부의 하원. 그러나 상원인 ‘참의원’은 자유당의 방해로 구성이 지연됨에 따라, 사실상 단원제 의회로 기능했다.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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