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회 한성문학상 - 소설 부문 가작> 정상성 찬가

    • 입력 2023-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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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3-12-04 00:00
[삽화 : 김서현(ICT 1)]

정상성 찬가

배지호

박경훈 씨는 자신의 안정적이고 화목한 가정에 제법 자부심이 있는 편이었다. 젊은 나이에 남부럽지 않은 회사에 취직하여 주변의 동경과 시샘을 한 몸에 받으며 큰 사고 없이 56세의 나이, 부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아내와는 대학 시절 동아리에서 만났다. 그때 아내는 학교에서 알아주는 미인이었는데, 그런 아내가 먼저 고백을 해왔다는 것이 경훈 씨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아내는 당시 이른바 문학청년이었던 경훈 씨의 신비스럽고 고고한 분위기에 끌렸다고 했다. 실제로 경훈 씨는 여자며 연애며 하는 것들보다 마음을 적실 시 한 편이 더 달콤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다.

나이를 제법 먹은 지금도 동창회의 술값 계산은 당연히 경훈 씨의 몫이었고, 명절이면 온갖 거래처와 회사에서 들어오는 선물이 냉동실과 냉장고를 꽉꽉 채워 번거로울 정도였으며, 가족 행사가 있을 때면 온 가족을 데리고 유명한 호텔의 뷔페에 가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었다. 이제 쉰둘이 된 아내는 예전만큼 아름답지 않았으나 경훈 씨는 단 한 번도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런 경훈 씨는 불편한 심기로 해가 중천인 금요일 점심에 회사 앞 상가를 거닐고 있었다. 반차까지 쓰고 이 근처에 있던 꽃집을 찾는 것이다. 평생 꽃 선물 한 번 해본 적 없던 경훈 씨가 꽃을 사느니 현찰이 낫다는 고집을 꺾고 꽃다발을 찾아 나선 것은 둘째 딸 탓이었다.

엊그제에 딸이 연락도 없이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노느라 새벽 세 시가 되어서야 돌아온 일이 있었다. 자꾸 이렇게 굴거든 용돈을 끊어버리겠다 엄포를 놓았기로서니 버르장머리 없이 ‘그럼 끊던가’ 하고 쏘아붙일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른에게 예의 없이 굴지 말라고 단단히 혼을 내기는 했지만 혹여 딸이 상처라도 받았을까 싶어 어른스럽게 선물이라도 건네며 먼저 화해를 하고자 했다.

막 청춘을 즐기기 시작했을 딸 - 그리 생각하니 어제의 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마음이 누그러진 것이 사실이었다 - 의 마음에 쏙 들만한 선물이 무엇인가 젊은 사원들에게 물어보고 다녔더니 하나같이 “돈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감았다. 경훈 씨는 절절한 사과 편지같이 귀찮은 데다 가장으로서의 권위도 상하는 것만 같은 선물 대신 간단하게 해결할 방법을 강구했고, 그 끝에 얻은 답이 꽃이었다. 꽃! 꽃은 선물로서의 가치도 크지 않고 돈으로 해결할 수 있으며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받아보고 싶어 하는 물건이었다. 정답이 틀림없다. 경훈 씨는 그렇게 확신했다.

“어서 오세요!”

마침내 찾아낸 꽃집의 유리문을 서류 가방을 든 손으로 밀고 들어서자 요란하게 울리는 현관종 소리 틈으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소 촌스러운 간판에 비해 젊은 목소리였다.

“안녕하십니까.”

경훈 씨는 대강 답하고 주변을 훑으며 시선을 목소리의 방향으로 옮겼다. 계산대 앞에는 단정하게 생긴 청년이 서 있었다. 차분하게 내린 머리카락 아래로 맑은 눈을 살짝 가린 안경알이 경훈 씨를 똑바로 비췄다. 아직 젊은 탓에 부드러운 입꼬리는 부담스럽지 않게 올라가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으나, 자연스레 떨어지는 셔츠 깃에서부터 어깨의 재봉선으로 이어지는 선은 남성적인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노란색 앞치마만은 경훈 씨의 눈에 차지 않았다. 아주 애도 아니고 영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경훈 씨는 다소의 무례를 범하는 줄도 모르고 빤히 청년을 바라봤다. 청년은 어색하게 눈을 굴리다가 무언가 묻었나 싶어 시선을 한 번 내려보고 괜히 장갑 낀 손으로 앞치마를 툭툭 털었다. 이런. 너무 쳐다봤나. 경훈 씨는 자연스레 그 뒤에 쌓인 꽃다발 중 하나를 살핀 척 시선을 흐리고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몇십 년간의 사회생활을 견뎌온 어른의 섬세한 호소는 이십 대의 정점을 스쳐 가는 젊은이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청년은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의 모자란 눈치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저거 예쁘네요. 얼맙니까?”

청년의 여유에 벌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 경훈 씨가 다음 수를 놓았다. 정신 차려, 청년. 일하는 중이잖아. 하고 다그치듯 자연스레 이어지는 질문. 그것은 자신의 결백을 다시 한번 공고히 하는 선언이었다. 경훈 씨는 자신의 실수로부터 완전히 회복했고, 이제 청년의 차례였다. 청년은 순진하게도 고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적당히 소박한 꽃다발이 하나 놓여있었다. 오늘따라 조금 일찍 출근해 미리 준비해 두려니 갑작스레 주문 취소 연락이 들어왔던, 포장 직전의 그것이었다.

“아, 저건 한 오…”

청년은 잠시 멈칫하고 눈앞의 회사원을 바라봤다. 늙었다는 인상보다는 어른이라는 인상에 가까웠다. 손목시계도 차고 있었는데 꽤 알이 굵고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양복에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맞춰진 각이 잘 어울리는, 이른바 중후한 미중년. 돈을 쓰는 데에 크게 부담이 없는 고객층. 꽃다발에 몇 송이만 더 끼워 넣으면 가격을 육만 원, 어쩌면 칠만 원까지도 받을 수 있었다. 그 정도 금액 차이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손님이 눈앞에 있기도 했다. 오, 하고 그 뒤에 말이 이어지지 않은 채 벌써 몇 초가 지났다. 육만 원? 칠만 원? 원래 생각대로 오만 원?

“만 원 정도 할 것 같아요.”

아쉽게도 청년은 거짓말이 익숙한 부류가 아니었고, 그런 사람들은 대개 관성적으로 진실을 말하고는 한다. 미묘한 아쉬움과 자신의 도덕성에 대한 안도를 뒤로 하고 전문가만의 고민을 하는 듯한 표정으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청년을 경훈 씨가 온화한 웃음을 띤 채 바라봤다. 경훈 씨는 이 공간에서 자신이 갖게 된 권력을 즐기고 있었다. 청년의 야트막한 가장쯤은 뚫어볼 수 있었으나 굳이 지적하지 않는, ‘좋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마음에 들었다.

“생각보다 싸네요? 십만 원 안 넘도록 풍성하게 꽂아서 줘봐요. 젊은 친구들 좋아하도록.”

십만 원. 청년은 숨을 너무 크게 들이쉬지 않게 조심하며 눈을 크게 떴다. 두 단계는 더 밝아진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 네! 그렇게 준비해 드릴게요.”

경훈 씨에겐 달리 할 일도 없었으므로 시간을 보내고자 카운터 앞의 가죽 의자에 앉아 한참 청년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섬세한 작업을 시작하려 장갑을 벗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거친 손이 드러났다. 능숙한 손이 척 봐도 형편없는 꽃을 집어 들어 겉 꽃잎을 벗겨내면, 숨겨져 있던 새것 같은 봉오리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히 젊음이란 놈은 늙은이의 눈을 끌어당기는 미숙함의 마력이랄까 하는 것이 있지, 그런 생각이었다.

“따님은 좋으시겠어요, 아버지가 낭만적이셔서.”

그런 생각을 엿보기라도 한 듯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경훈 씨는 당혹감을 숨기려 호방하게 웃으며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허허, 제가 이래 봬도 한창때에는 문학청년이었습니다. 캠퍼스에서는 시집을 놓은 적이 없었고…”

청년이 조용히 웃다가 완성된 듯한 꽃다발을 들고 카운터로 다가왔다.

“인기 많으셨을 것 같아요.”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뭐가 그리 좋다고들 몰려다녔는지.”

“카드도 써드릴게요. 생일 선물이세요?”

기분 좋게 지갑을 꺼내려는 경훈 씨를 청년이 멈춰 세웠다. 카드? 경훈 씨의 미간이 옅은 골을 이루며 찌푸려졌다. 영 계집 같은 짓 같기도 했고, 왜 사주는 꽃인지 밝히기도 싫었다.

“됐습니다. 귀찮게 뭘.”

“그래도 꽃만 주는 것보다는 한두 마디라도 써서 같이 주는 게 요즘 학생들 취향에는 더 맞을 거예요.”

“제가 이 뒤에 또 갈 곳이 있어서, 이 정도면은 됐습니다. 영수증은 필요 없어요.”

경훈 씨가 난처한 웃음을 무기 삼아 대화를 끝내자, 청년도 별수 없이 마주 웃으며 건네받은 카드로 구만 오천 원을 결제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깍듯이 인사하는 청년에게 경훈 씨는 손을 살짝 들어 인사한 뒤 예의 그 요란한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섰다. 큼직한 종이가방 안에 들어찬 꽃다발이 기분 좋게 묵직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리모트 키의 버튼을 누르자 길가에 주차된 검은 승용차가 삐빅. 하고 문을 열었다. 고장 난 차 에어컨 수리를 맡기고 집에 일찍 들어가 골프 중계나 보며 쉬다가 집에 돌아온 딸에게 꽃을 한가득 안겨준 뒤 멋진 가장으로 주말을 보내려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런 계획이 무색하게 오후 8시의 경훈 씨는 분노를 눌러 담으며 개인택시 뒷자리에 팔짱을 끼고 앉아있었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숨김없이 한숨을 쉬는 경훈 씨에게 택시 기사가 마침내 말을 걸었다. 제법 익숙한 억양의, 사투리가 살짝 섞인 말투였다.

“뭔 일 있으세요?”

“별일 아입니다.”

마음이 놓였다. 자연스레 말투도 풀어졌다. 택시 기사는 분위기를 풀려는 듯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자식이에요, 아내예요?”

저녁 시간의 도로는 한산했다. 차가 막히는 것은 퇴근길인 상행선뿐이었다. 그런 괴리된 분위기인지 무엇인지가 경훈 씨의 마음을 간질여 툭 말을 뱉게 했다.

“간만에 딸한테 선물이나 한 번 할까, 싶어서 이래 사 갔는데.”

그렇게 말하며 꽃다발을 들어 보이자 제법 큼직한 것이 룸미러에 우악스레 들어찼다.

“어이구, 큰 거 사셨네.”

“싫다고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골이 아파서 그냥 나왔습니다.”

기사는 흐흐 웃으며 창문을 열었다. 빠르게 달리는 차 안으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조금 시끄러웠지만 제법 운치가 있었다.

“잘하셨네요. 집구석에 박혀있어 봐야 편드는 사람도 하나 없고…”

경훈 씨는 늙은 남성과의 대화를 즐겼다. 그런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해졌다. 어쩌면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와 못다 한 담소를 나누는 것 같기도 했고, 이제 그런 것을 아주 슬피 여기거나 맥이 탁 풀려 그리워하기만 할 나이도 아닌지라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연유로 경훈 씨는 열이나 식히라는 듯 조용히 창문을 열어준 이 기사와의 대화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화가 한결 누그러졌다.

“그래, 꽃은 무슨 일로 사셨습니까? 생일선물로도 잘 안 하는걸.”

“그젠가, 딸애가 친구들이랑 논다고 새벽 세 시가 되도록 연락을 안 하지 뭡니까.”

“아이구, 아버지 걱정되도록.”

“그렇지요? 그래서 또 따끔하게 혼을 냈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는 틈에 기사가 끼어들었다.

“아빠는 암것도 모른다 성질 한 번 홱 내고 방에 들어갔지요?”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거니와, 우선은 그 문장이 너무 우습고 좋았다. 경훈 씨는 껄껄 웃다가 말을 이었다.

“예. 그래서 화해라도 할까 하는 마음에 이제… 요즘 젊은 애들이 좋아하는 선물 없느냐고 부하 직원들한테 묻고 다녔더니 꽃 얘기가 나와서.”

“또 너무 속된 말이지만은… 월요일이면 그 직원도 이제 아주 조졌네요.”

택시 안이 잠깐 두 남성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신경 써서 사 갔는데 촌스럽게 이게 뭐냐느니, 이런 것 좀 하지 말라느니…”

딸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 경훈 씨는 가장의 권위를 숙이기 싫어 ‘어제는 아빠가 미안했다. 너 좋아할까 싶어서 이것도 사 왔다.’ 하는 말 몇 마디도 꺼내지 않고 그저 “이거면 됐지?” 하며 막 집에 들어오는 딸에게 꽃다발을 건넨 것이다.

다행히도 택시 기사는 경훈 씨를 의심하지 않았다. 적당히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버지라는 존재가 공유하는 일방적인 힘듦과 고됨을 쓰다듬고 핥아주다가,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너무 상심 마시고요. 딸 키우는 게 다 그렇지요.”

마지막까지 둘은 웃으며 헤어졌다. 경훈 씨는 한참이나 차를 몰고 멀어지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이제 걸음을 옮겨야 했다. 현관 종이 요란스레 울렸다.

청년이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경훈 씨가 덥석 말을 던졌다.

“딸 놈이 싫다고 합디다. 청년은 좋아하는 것 같으니 가져요.”

나름의 이유와 논리가 있었다. 집에 그냥 놔두자니 딸이 보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킬 것 같았고, 그렇다고 그냥 버리자니 아내가 돈이 아깝다며 혼낼 것 같았는데, 막상 여기까지 와서 환불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려니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훈 씨는 팔자에도 없던 꽃 선물을 외간 남자에게 하게 되었다.

“네?”

청년은 당황했다. 환불 요청은 여러 번 받아 봤어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생애 첫 꽃 선물 이기는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굳어있던 청년은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일단 웃으며 차분히 생각했다. 몇 시간이 지났지만 꽃이 크게 상하지도 않았고, 물에 꽂아두면 다른 꽃다발에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꽃값이 비싼데 돈은 아낄 수 있으면 좋았다. 당장 임대료 내기도 벅찬 와중에 마다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청년은 조금 더 망설이다가 결국 손을 내밀었다. 제 손으로 직접 만든 풍성한 꽃다발이 한가득 쥐어졌다. 저절로 겸연쩍은 웃음이 나왔다.

“그래요, 좋아하니 나도 기분이 좋네.”

경훈 씨는 뿌듯하게 웃으며 손을 털었다. 그럼, 수고해요. 하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발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청년의 웃는 얼굴이 제법 인상적이었다. 아, 젊음이란 얼마나 아름답던가. 저도 분명 이십 대 중반쯤에는 저리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내에게 사랑을 속삭이고는 했다. 그때 우리는 그토록 아름다웠지. 풀밭에 핀 팬지처럼 생긋생긋 웃는 가운데 피어나는 짙은 아름다움… 그러나 그것은 옛이야기로, 둘은 이제 공원의 민들레 같은 사랑을 이어가고 있었다. 평범하고 수수해진 배경 같은 사랑.

하지만 경훈 씨에게는 돌아가야 할 집이 있었으므로 결국 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절묘한 순간, 문이 반쯤 열리고 현관 종이 울리는 순간에, 아직도 꽃다발을 안고 있는 청년이 입을 열었다.

“저, 가게 문 닫던 참이었는데. 가볍게 맥주라도 한잔하실래요? 제가 살게요.”

호흡을 빼앗긴 경훈 씨가 조금 전의 말을 마치지 못한 채로 서 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됐어요, 젊은 청년한테 돈이 어디 있어서 술을 산다고… 그냥 용돈 벌었다 생각하고 쉬어요.”

“제가 받기만 하면 너무 죄송해서요!”

청년이 급하게 말했다. 둘은 놀란 눈치로 서로를 바라봤다.

“아… 아버지가 항상 말하셨거든요. 받은 게 있으면 꼭 갚으라고.”

아버지의 가르침. 경훈 씨를 설득하는 데에는 그 두 단어면 충분했다. 순식간에 마음이 동한 경훈 씨는 제가 다 뿌듯한 표정이 되었다.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참한 젊은이였다.

“그런 거라면야 또 거절할 수가 없네. 내가 잘 아는 일식집이 있으니 그리로 갑시다. 늙은이 푸념 들어준다 생각하고 받아마셔요. “

“네? 아, 일식집같이 비싼 건...”

청년이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꽃다발을 안고 있느라 자세가 어정쩡했다. 경훈 씨의 눈가에 주름이 그어졌다. 아랫사람을 달랠 때 으레 나오는 표정이었다. 손바닥이 사선을 그리게 들고, 청년에게 몇 번 흔들며 답했다.

“제가 어디 술 한 잔 사주면서 돈 걱정해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럴 때 얌전히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 마셔요.”

청년의 표정에서 웃음이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조금 당황한 것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허, 그냥 받으래도.”

경훈 씨가 한 번 더 강요하자 그제야 청년은 뒤통수를 긁으며 ‘그럼, 사양않고…’ 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경훈 씨는 무언가를 증명해 낸 것 같은 도취감에 빠져 만족스레 웃으며 지금껏 어깨를 짓누르던 유리문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저, 그럼 얼른 정리만 하고 나가겠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저…”

아뿔싸. 차를 놓고 왔지. 자연스레 도로 앞을 가리키려던 경훈 씨가 잠시 굳어 으음… 하고 심기 불편한 소리를 내고 있자 청년이 빠르게 말을 이어받았다.

“제가 차멀미가 조금 있어서, 멀지 않다면 걸어가도 괜찮을까요?”

이렇게 싹싹한 청년을 보는 것이 얼마 만이던가. 경훈 씨는 잠시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요, 그러면 그렇게 합시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나와요.”

문을 닫고 나온 경훈 씨는 마침 꽃집 앞에 놓여있던 흰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관성적으로 흔들리며 종소리를 흩뿌리는 유리문이 결국 잠잠해지자, 문 너머에서 꽃병 같은 것들이 정리되는 소리가 들렸다.

경훈 씨는 청년을 부하 직원으로 들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윗선의 눈치도 볼 줄 알았고, 요즘 세대와는 다르게 싹싹한 맛이 있어 어느 미팅에 데려가든 제 체면도 확실히 챙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쉬움을 삼키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담뱃갑을 코트 안주머니에 넣기 전에 한 번 흔드는 것이 경훈 씨의 사소한 버릇이었는데, 돛대만 남거든 들리는 그 쓸쓸한 소리가 리마인더 역할을 해주었다.

‘하나 새로 사야겠구만.’

오래 지나지 않아 청년이 나왔다. 푸른색의 가벼운 카디건을 걸친 모습이 퍽 신선한 느낌의 옷차림이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죠. 흙을 흘려서…”

“별로 안 기다렸어요. 갑시다. 너무 늦어지면은 또 안되니까.”

경훈 씨는 제법 길게 남은 꽁초를 재떨이에 버리고 일어섰다. 둘은 20분 정도 걸어가며 요즘 세대에 대해 얘기를 했다. 둘 다 귀찮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청년은 내내 적절한 반응을 보이며 공감하는 부분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변호하고 싶은 부분에서는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스레 설득했다.

그렇게 도착한 일식집은 제법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경훈 씨도 거래처의 임원과 업무차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니라면 오지 않는 곳이었다. 딸에게 거절당한 가장의 위엄을 되찾고 싶다는 일차원적 욕망이 그를 부추긴 것이었다. 경훈 씨는 태연하게 안으로 들어가 룸 자리 하나를 부탁했고, 마침 자리가 비어 기다리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청년은 주문을 망설였다. 가격 탓이었다. 경훈 씨는 결국 두 명분의 코스 요리를 주문하고 제법 값이 나가는 사케 한 병을 부탁했다. 전채가 나오기까지 몇 분이 걸렸는데, 그 사이에 청년은 다시 한번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요즘 꽃집 장사에 대한 푸념을 몇 마디 했다. 경훈 씨는 어른스레 청년을 달랬고, 상투적일까 꺼리던 조언을 몇 마디 해줬다. 이렇게 기억이 선명한 것은 사시미를 끝내기 전까지 뿐이었다.

술이 좋아서인지, 음식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상대가 좋아서인지, 스시가 나올 때쯤 해서는 둘 다 적당히 기분이 좋을 만큼 취해있었다. 경훈 씨는 무례의 선 위에서 휘청대며 온갖 대화를 뒤뚱뒤뚱 끌어나갔다. 젊어서 좋겠어요.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그때가 저기… 힘이 제일 좋잖아. 그리고 한참을 껄껄대며 웃다가, 그래. 여자친구는 있어요? 아직 없다고! 영 숫청년이구만. 경훈 씨 자신도 쏟아내는 질문에 이따금 놀랄 만큼 흔치 않은 태도였다. 이 공간은 점잔을 빼며 허허, 그러십니까. 아이구, 그럴 수가. 하며 상대의 말을 받아주는 역일 때에나 앉던 자리였으므로 더더욱 그랬다.

생대구 지리를 한 국자씩 퍼담아 크어어, 하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시끄럽게 마실 때는 둘 다 얼굴이 벌겋게 익은 채로,

“내가 마음에 들어 그러는데, 앞으로 종종 술이나 하자고. 이름이 뭔가?”

“이 현이라고 합니다. 외자 이름이에요.”

“히야, 세련되었네.”

하고 잠시 조용히 앉아 물을 한 모금씩 마시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흐릿하게나마 기억나는 대화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경훈 씨는 다음 날 비즈니스호텔에서 눈을 떴다. 질펀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삑삑대는 핸드폰 알람이 골을 울리는 것 같아 서둘러 소리를 끄자 정적이 찾아왔다. 열두 시 삼십 분. 해가 중천이었다.

흥이 어지간히도 올랐었구먼. 핸드폰에 아내의 번호를 입력하며 창문을 열고 담배를 꺼내자 쓸쓸한 달각 소리가 들렸다. 돛대였지, 참. 불을 붙이고 한 입 깊이 들이마시니 통화가 연결되었다. 어, 여보. 연락을 못했네. 으응, 괜찮지. 어제 꽃 환불받으려고 갔다가 회식에 붙잡혀서 말이야. 임원분이랑 마시다 보니, 어? 최 전무님 있잖아. 어어. 늦어서 회사 근처에서 하루 잤어. 저녁 먹기 전에는 들어갈게. 푹 쉬어. 전화가 끊길 때쯤에는 꽁초밖에 남지 않아 재떨이에 남은 것들을 담뱃갑에 털어 넣고 침대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그때였다. 경훈 씨의 눈에 무언가 비정상적인 것이 보였다.

“저게 뭐야?”

혼자 중얼거리며 쓰레기통에 다가간 경훈 씨는 겁에 질렸다. 담뱃갑이 그 무언가를 반쯤 가리며 놓여있었는데, 드러난 부분은 마치 축 늘어난 반투명 수술용 장갑같이 보였다. 손을 뻗어 들어 올릴 용기가 없던 경훈 씨는 쓰레기통을 툭 발로 찼다. 담뱃갑이 밀쳐지자 진실이 드러났다.

콘돔이었다. 그것도 이미 쓴. 희뿌연 액체가 아직도 안에 고여있었고, 누구인지는 몰라도 깔끔하게 묶어 새지 않도록 해둔 채였다. 경훈 씨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의문에 답하기도 전에 또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 옆 협탁, 전화기에 깔린 작은 쪽지였다. 깔끔한 필체로 먼저 가게 되어 미안하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피곤해 보여 늦은 체크아웃 비용을 미리 결제하고 간다는 추신도 붙어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 청년이었다.

짜 맞춰진 정보는 경훈 씨의 기억을 되새겼다. 어젯밤은 유난히 길었고, 경훈 씨는 그 사실을 제법이나 즐겼다. 경훈 씨는 파랗게 질려서 술에 절어있는 몸을 씻지도 않고 호텔을 뛰쳐나와 택시를 잡았다. 근처 만화방으로 좀 가주십시오. 경훈 씨는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만화방에 자주 갔다. 버릇 같은 것이었다. 활자에 눈을 기울이지 않고 그림을 훑어 내리다 보면 생각이 가라앉았으므로.

자동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경훈 씨는 구석에 있는 침대 자리로 향하며 라면 한 그릇을 주문했다. 점원은 피곤한 표정으로 카드를 받아 결제한 뒤 들어온 시간이 적힌 영수증을 쥐여줬다. 눈길을 끄는 만화를 아무렇게나 집어 자리에 앉았지만 경훈 씨의 혼란은 가시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술김에 해버렸으니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여자도 아니고 남자인데? 그러나 경훈 씨도 그것이 어불성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 영양가 없는 괴로운 생각을 하느라 좀처럼 책장을 넘기지 못하는 경훈 씨에게 점원이 다가와 라면을 건넸다. 경훈 씨는 다소 놀라 움찔하고 책을 놓칠 뻔했다가, 자리에 놓여있는 작은 탁자에 라면과 김치를 얌전히 올려놓고 떠나는 점원을 바라봤다. 대학을 갓 졸업했거나 졸업 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이었는데 당연하다는 듯 조금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 주변 인물. 그 이상의 무엇도 없었다. 경훈 씨는 두려워졌다. 그야 지금까지는 당연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당장 어제 처음 본 청년과 그토록 경쾌한 기분으로 술까지 마셨다는 사실이 기묘한 괴리를 두었다. 떨떠름한 기분을 숨기고 입에 면발을 한 젓가락 쑤셔 넣으며 만화책을 펼쳤다. 주인공이 끝없이 몰려드는 괴물들을 죽이고 있었다. 경훈 씨도 비슷하게 생각을 죽였다. 절실함을 연료 삼아 그려진 세계 속으로 깊이 걸음을 내디뎠다.

얼마나 읽어나갔을까, 젊고 건장한 주인공이 동료에게 일갈한다. 네가 원하는 게 정말로 그것뿐이냐? 부모에게, 친구에게, 사회에게 ‘좋은 놈’이라고 인정받는 것? 동료가 고뇌 끝에 고향과 가족과 그가 성취해 온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주인공의 손을 붙잡자, 마치 감옥에서 풀려나는 듯한 연출과 함께 주인공이 동료를 껴안는다.

경훈 씨는 치미는 욕지기를 간신히 참아내고 책을 덮으며 현실로 빠져나왔다. 속에 담긴 무언가를 토해내려는 몸을 진정시키고자 불어 터진 라면을 입에 욱여넣었다. 김치 몇 조각까지 우적우적 씹어 넘기자 탈력감이 몰려들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해가 다 진 시간에 아파트 앞에서 몇십 분을 서성거린 끝에 결국 현관문을 연 경훈 씨의 코에 비릿한 콩나물국 냄새가 훅 끼쳐왔다.

“웬 콩나물국이야?”

의무처럼 그렇게 질문하긴 했으나 경훈 씨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선하기 그지없는 아내가 자기 말을 듣고 그러면 피곤하겠구나, 하고 염려하여 굳이 재료를 사와 한 냄비 끓여둔 것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안방 문을 열고 나온 아내가 왔어? 피곤한 것 같길래 끓여뒀지. 하고 답해 주었다. 그것을 차마 물리지 못한 경훈 씨는 그럼 국만 한 그릇 먹을게. 속이 안 좋네. 하고 식탁에 앉아 아내가 떠다 준 콩나물국 한 그릇을 끔찍한 기분으로 비울 수밖에 없었다.

주말은 순식간에 흘렀다. 경훈 씨는 원래 가정에 충실한 가장이 아니었으므로 그를 귀찮게 하는 일도 없었고, 그저 토요일과 일요일을 내내 거실 소파에 누워 죽은 듯 자다가 티브이를 보다가 하며 허비했다. 자신이 남자를 안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대체 어쩌다가 그런 일까지 치르게 되었는가 고민하기도 했으나 첫째로 괴로웠고, 둘째로 두려웠으며, 셋째로 조금도 진척이 없어 그만두었다.

월요일이 되자 경훈 씨는 자신이 힘든 상태임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업무를 하는 둥 마는 둥 마치고 퇴근 시간 정각에 회사를 나섰다.

집에 가는 것이 두렵기만 했다. 자연히 속도도 나지 않았다. 어제 막 면허를 딴 사람처럼 느릿느릿 차를 몰고 도로를 나아가던 경훈 씨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제가 무언가 죄라도 지어 그 벌을 받는 것 같았다. 아주 지독한 벌을. 끝없이 정신병적 사고를 되새기는 경훈 씨의 앞에 신호등의 빨간 불이 위압적으로 드리웠다. 차에 꽂아두는 전자담배를 깊이 한 입 들이마셨다가 창문을 열고 후우, 회한을 담아 내뿜었다. 가물거리는 연기 틈으로 불이 하나둘 꺼지는 꽃집이 보였다.

경훈 씨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에 악셀에 발을 올렸지만 신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십 초 남짓할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저곳은 죄의 온실이었다. 경훈 씨의 결백을 시샘하여 요나의 시험과 같이 심해 속으로 처박아 버리려는 악마의 굴이었다. 그러나 경훈 씨는 동시에 그것을 마주하지 않고서는 이전과 같이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경훈 씨가 핸들에 머리를 묻고 으으… 하며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차가 신경질적인 경적을 울렸다. 뒤에 따라오는 차도 시끄럽다는 듯 마주 경적을 울렸다. 곁눈질을 하자 녹색의 간판은 어느새 빛을 잃은 채였다. 분명 문을 닫을 시간까지는 제법 남았을 텐데, 경훈 씨는 저것이 저를 부추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이 아니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없다, 하고 경고하는 것도 같았다.

“으, 으으… 으아악!”

경훈 씨는 핸들을 꽉 움켜쥐고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른 뒤 차를 돌렸다. 길가에 차를 대자 때마침 청년이 걸어 나왔다. 익숙한 차를 발견한 현 씨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죄의식이 있기로는 현 씨도 마찬가지였다. 걸음을 떼지 못하고 움찔거리던 현 씨를 앞두고 차창이 천천히 내려갔다. 도보와 차도의 단차 탓에 경훈 씨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일찍 닫네요.”

현 씨는 당황하며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준비되지 않은 머릿속을 휘저어 문장을 만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그게… 손님이 영 없어서요.”

도로에 차가 다니는 소리만 잠시 들렸다. 현 씨는 괜히 말을 덧붙였다.

“오늘은 피곤해서 조금 일찍 들어가려고 했어요.”

경훈 씨가 답했다.

“그럼 이 뒤에는 일정이 없나 봐요?”

“네, 그냥 집에 가서 쉬려고요.”

경훈 씨는 미간을 구기고 숨을 깊이 내쉬었다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합리화를 마치자 드디어 용기가 생겼다.

“같이 저녁이나 한 끼 합시다. 물어볼 게 있어서.”

현 씨는 언제나처럼 곤란한 듯 웃었다. 그것이 경훈 씨를 괴롭게 만들었다.

“근처에 잘 아는 고깃집이 있어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화분 몇 개만 들여놓으면 끝나거든요.”

경훈 씨는 그제야 차창 너머로 배까지만 보이는 현 씨를 살폈다. 여전히 그 앳된 노란 앞치마를 두른 채였다.

“그래요, 그럼.”

현 씨는 걸음을 돌려 꽃집으로 향했다. 밖에 놓인 큰 화분을 들어 올리자 잠시 땅에 끌리며 불쾌한 소리를 냈다.

경훈 씨는 그 옆에 아무 일도 없는 듯 앉아있는 흰색 플라스틱 의자를 바라봤다. 그것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존재했다. 안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냈다. 그 쓸쓸한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퇴근 전에 돛대를 태워버렸다. 경훈 씨는 시동이 꺼진 차에 앉아 불안하게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머리가 괜히 근질거려 벅벅 긁었다.

불쾌감과 후회 따위의 감정들이 끓어올랐다. 그러나 그 틈에서 익숙하고도 두려운 감정 역시 느껴졌다. 구태여 이름 붙이고 싶지 않은 감정. 그것은 금요일 저녁 택시의 뒷자리에 앉아 기사와 대화를 나누며 느낀 감정이기도 했고, 학생 시절 한바탕 싸우고 돌아온 경훈 씨에게 “이겼어?” 하고 물어보는 아버지를 보며 느낀 감정이기도 했다.

저 멀리서 한 움큼의 현관 종이 눈치 없이 명랑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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