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회 한성문학상 - 소설 가작> '피그말리온의 서커스'

    • 입력 2016-11-29 15:22

글 : 정유진(패션 1)
일러스트 : 이학재

도시 외곽에 위치한 희준의 동네는 묘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그것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며 재개발이니 뭐니 말이 많을 때에도 굳건히 동네를 지켰다. 그러다보니 동네주민들은 최소 10년 이상 얼굴을 맞대고 살아갔다. 희준 역시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동네를 떠난 적이 없었다. 옆집 장 씨 아저씨가 저녁노을이 질 무렵 담배 한 개비를 꺼내와 태우는 것도, 친구 현식이가 마당을 비질하기 이전에 뿌릴 물을 뜨러 개울가로 향하는 것도 이젠 안보이면 이상한 하루 일과가 되었다. 작은 동네 사람들이 똘똘 뭉쳐 살고 있는지라 새 얼굴을 보기는 어려웠다. 기껏해야 도시로 떠난 이장님 집 큰아들이 명절마다 종합냄비세트나 솜이불세트를 들고 찾아오는 게 전부였다. 이게 익숙한 것 이었다. 나쁠 것은 없었다. 가끔 심심한 것 빼고는.
동네 입구에서 산을 향해 쭈욱 들어오다 보면 꽤나 큼직한 공터가 하나 있었다. 소도시를 중점으로 도는 신기료장수가 멈춰서 장사판을 펼치기도 하고 고등학교 축제 판이 커지면 커다란 천막을 세우고 먹거리 장터를 열던 곳 이었다. 그 외에는 아이들의 놀이터로 쓰이거나 오밤중에 어른들이 조각 불에 쥐포 한조각과 막걸리 한잔을 하며 삶의 희로애락을 풀어냈다. 가을 추수 경에 집에서 키운 태양초 고추나 참깨들을 꺼내와 꾸덕하게 말릴 요량으로 쓰이는 게 가장 효율적이었다.
그 날은 유독 문학 수업이 지루한 날 이었다. 처용이 역신에게 관용을 베풀든 저 요망한 년이 바람을 피웠다고 깽판을 치든 내가 알게 뭐람. 노란 형광펜으로 향찰부분에 직직 선을 그어대던 희준이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 위로 풀썩 엎어졌다. 땡볕이 가득한 흙운동장과 저 멀리 공터까지 한눈에 보였다. 지루한 풍경에 잠이나 잘까 생각하던 희준의 시야 한 귀퉁이에 커다란 무언가가 움직이는 게 포착되었다. 실로 간만에 눈에 익지 않은 것이 보이자 자세를 바로 했다. 또 도시에서 삐져나온 트럭장사인가, 설레는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에 초점을 집중한 희준이 입을 떡 벌렸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트럭이었다. 교과서에서 본 컨테이너. 바퀴가 여섯 개 넘게 달린 트럭. 희준은 생전 처음 보는 사이즈의 컨테이너트럭이 공터에 정차하는 것을 목격했다. 어른들은 다 직장이 있는 도시로 떠나있었고 제 또래 아이들은 저처럼 학교에 잡혀있었다. 다른 누군가도 희준처럼 수업 중간에 한 눈을 판 것이 아니라면 트럭을 목격한건 현재로써 희준이 유일했다.
처용가에 지루함을 느낀 것은 비단 희준뿐만이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예지가 헐 공터 좀 봐봐! 라며 소리를 질렀고, 동시에 모든 아이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어디어디? 아이들은 창가로 몰려왔다. 트럭에선 알록달록한 천과 파이프 같은 것들이 나와 하나 둘씩 자리를 잡더니 이내 대형 천막을 이룬 채 공터를 꽉 채우고 있었다. , 컨테이너 쪽에서 물건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와 천막 안쪽으로 들어갔다. 구경하던 아이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출석을 부르는 선생의 목소리였다. 희준이 자세를 바로 했다.
기대하는 게 생겼더니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담임 선생님이 종례를 위해 교실로 들어오기 전 부터 부리나케 책가방을 챙겨뒀던 희준은 해산하라는 말에 바로 교실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공터에 도착했을 때는 막 천막이 완성된 모양인지, 위엄을 뽐내며 색색의 깃발을 나부끼고 있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선물로 사다준 동화책에서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직감적으로 희준은 천막의 용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서커스. 동화책 표지를 장식하던 원색의 천막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나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희준의 뒤로 공터에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천막을 손으로 쓸어보던 현식이 가장 먼저 말을 텄다.
"아무도 없나?"
"아닌데?"
현식이 손으로 쓰다듬던 천막을 뚫고 또래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튀어나왔다. 지레 질겁한 현식이 뒷걸음질을 치며 천막을 쓰다듬던 손을 탈탈 털어냈다.
", 나 더러운 거 아니그든?"
그런 현식을 보고 빈정상한 모양인지, 사내아이는 천막을 비집고 나오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매만지고는 투덜댔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다. 청바지, 걷어 올린 줄무늬 티셔츠. 교복을 입혀놓고 희준 쪽 무리에 섞어뒀다면 위화감 하나 없이 녹아들 법 했다. 사내아이는 개구진표정을 지우지 않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희준의 무리를 훑었다.
"이 동네 애들이야? 반갑다!"
"야 이거 뭐냐?"
"이거? 우리 천막!"
"아니, 천막인 건 아는데……."
서커스 천막이야. 사내아이가 현식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나는 피그말리온 서커스단의 곡예사 박지민이라구 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 조각상 덕후에게서 따온 거야. 이름 촌스럽지? 나두 알아."
자연스레 자기소개를 한 지민이 아이들을 둘러보더니 희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반자동적으로 손을 맞잡아 악수를 한 희준이 입을 헤벌쭉 벌리고는 커다란 천막을 올려다봤다. 학교와 공터 사이의 거리가 꽤 멀어서인지 눈앞에 있는 천막의 크기는 아까 대충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거대했다. 그런 희준을 바라보던 지민이 물었다.
"많이 신기해?"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려 대답을 대신한 희준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우리 동네에서 서커스 열거야?"
"그런 것 같은데?"
"이 작은 동네에?"
희준의 질문에 이어 예지가 끼어들어 물었다. 지민이 눈을 접어 웃으면서 고개를 까닥였다. 이어 천막이 한 번 더 바스락 거리더니 또 다른 사내아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빡지, 단장이 니 찾는다. 사내아이는 희준의 무리는 보이지도 않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지민에게 용건을 던진 후 다시 천막 속으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지는 줄 알았더니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해맑게 웃으며 다시 튀어나왔다. 새로운 친구들이가? 사내아이는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 때 아닌 정적에 멋쩍어진 희준이 뒷목을 긁적이자 그가 희준에게 가서 냉큼 어깨동무를 했다.
", 니 쫌 잘생깃다."
", ?"
굳이 좋은 말을 해주는 아이를 떨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희준이 가만히 몸을 맡겼다. 알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사내아이가 방금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탁 치는 흉내를 냈다. 얼결에 사내아이의 어깨동무에서 풀려난 희준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니 내 이름 모르제? 채형원이다, 형원. 자에 쓴다."
"나는 김희준……."
"이름 좋다."
가지런한 아랫니를 보이며 형원이 웃었다. 같이 웃어 보일 수밖에 없는 웃음에 희준이 긴장을 풀었다. 몇 년 만에 만나는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형원이 희준의 손을 잡아끌고는 이곳저곳을 누볐다. 아직 무대까지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천막 안쪽도 구경할 수 있었다. 자리를 잡지 못한 갖가지 의상들은 물론, 서커스에 쓰이는 훈련된 동물들과 괴상한 도구들까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오색가지 훌라후프가 쌓여있는 것을 본 희준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러나 까무잡잡한 큰 손이 희준의 팔목을 잡아채며 경고했다.
"만지지는 마라."
", 미안……. 실수야."
"잘못한 게 아이라, 닐 위해서 그런 기다."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이었으나 희준은 그러려니 하고 맞장구쳤다. 박스포장을 뜯고 있던 남자애가 형원을 보곤 손을 휘휘저어보였다.
", 또 농땡이?"
형원이 가자미눈을 만들었다. 그것을 완벽하게 무시한 아이가 궁시렁거렸다.
"일이 이만치 쌓여있는데 지는 장난질이나 하고……."
", 박스만 풀면 되는 거야?"
"도와주게?"
희준의 말을 들은 아이가 화색을 띈 채 되물었다.
"많이 힘들면 도와줄게. 그냥 구경만 하면 우리가 민폐인 것 같고."
"대박. 그러면 박스포장들 다 뜯어서 물건만 꺼내놓으면 돼. 손으로 만져도 괜찮은 것들이야."
"전현욱."
이 아기가 현욱이란 아이구나. 형원의 입에서 나온 호칭에 즉각 반응하는 아이를 보며 희준이 생각했다. 아까 전 형원의 낯간지러운 말이 떠올랐다. 행여 붉어진 얼굴이 들킬까봐 현식의 옆자리로 향했지만 다시금 자신의 손목을 잡아채는 손길에 저지당했다. 형원이 희준을 끌고는 반대편으로 향했다.
"야야, 나는 왜?"
"저거 말고, 내 좀 도와 도."
형원의 손에 잡혀 끌려가듯 바깥으로 향했다. 희준의 친구들은 현욱을 도와주는데 여념이 없었다. 자신이 사라지는지도 모르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보며 희준이 서운함을 느꼈다.
"아들이 니 사라지는지 모르니까 서운하나?"
귀신같이 희준의 심정을 눈치 챈 형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졸지에 치부까지 낱낱이 파헤쳐진 기분에 희준이 고개가 부정을 표현하며 잽싸게 흔들렸다.
"괘안타. 대신 내 재미있게 놀아줄게. 니 서커스 처음 보제?"
". 우리 동네에 이런 거 처음 오거든."
희준의 손가락이 천막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다. 우리도 여 처음 오니까. 자신의 말을 가지고 노는 형원의 모습에 희준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형원이 이를 들어내 보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구경시켜주까?"
형원의 손이 가리키는 것은 천막을 비롯한 물건들이 들어있던 거대한 컨테이너 트럭이었다. 희준이 호기심어린 눈을 한 채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괜히 형원이 약속을 무를까봐 걱정되었는지 손을 꽉 잡았다.
"알았다. 대신-"
라는 말과 동시에 아무것도 달려있지 않던 희준의 손목 위로 손수건 하나가 나타났다. 우와, 하고는 감탄사를 내뱉은 희준이 자신의 손목과 형원의 손을 번갈아보며 신기해했다.
"선물. 풀면 내 슬퍼 할기다."
"안 풀어요, 안 풀어."
희준이 안심시키듯 형원을 달래며 말했다. 만족한 듯 형원은 손수건이 묶인 희준의 손목을 끌고는 곧장 컨테이너 안쪽으로 향했다. 완벽하게 빛을 차단시킨 실내는 바로 앞도 분간가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형원이 희준의 손을 잡고 있지 않은 자유로운 손으로 벽면을 더듬거렸다. 스위치를 찾았는지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실내가 밝게 비춰졌다.
알알의 전구들이 달린 큼직한 거울과 색색의 옷이 걸려있는 옷걸이, 칭칭 동여매어져있는 수많은 박스들과 괴기스러운 칼과 밧줄들이 널려있었다. 컨테이너 반대편에는 얇은 철장으로 지어진 우리가 있었다. 입을 헤벌쭉 벌린 채 열심히 구경하는 희준을 끌고 형원이 안쪽으로 나아갔다.
형원의 손에 붙잡혀 가면서도 보이는 것을 찝어가며 물어보는 희준이 목소리에는 신이 잔뜩 나 있었다. 이해한다는 듯 형원이 간단하게 물어본 것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가장 어지럽혀져있는 분장대 앞으로 향한 형원이 거울을 마주보게 희준을 앉혔다. 영문도 모른 채 거울로 형원이 하는 행동을 살피던 희준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빨간색 동그란 코와 후줄근한 원색의 정장 큼지막한 구두. 형원이 무슨 분장을 하는지 바로 눈치 챘다. 그러고 보니 거울 앞에 늘어져있는 화장품들은 다 진한 색조화장품이었다.
"사투리 쓰는 광대야?"
"이거 할 때는 사투리 안 써."
빨간 코를 붙인 형원이 짐짓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위화감 없는 표준어 구사에 희준이 두 손으로 박수까지 쳐 보였다. 우스꽝스럽게 과장시킨 목소리로 형원이 자기소개를 했다. 손가락 스냅이면 희준의 귀 뒤에서 장미꽃이 튀어나오고, 입바람으로 부풀린 풍선이 헬륨을 넣은 것 마냥 자유롭게 공중에 떠다녔다. 거대한 모자 속에서 마지막으로 비둘기까지 꺼내 보인 형원이 두르고 있던 망토로 희준과 자신을 덮었다. 큼지막한 망토는 두 사내아이를 덮고도 품이 남았다. 희준이 장난스레 망토를 걷어내기 위해 손을 휘적였다. 그러나 망토를 더듬던 손은 차갑게 식어있는 형원의 손에 의해 제지되었다. , 라고 묻기도 전에 낮은 목소리가 나지막히 경고했다.
"박지민이랑, 전현욱이랑, 서커스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마라."
"? 그럼 너도 믿지 마?"
"내 안 믿을 기가?"
형원이 시무룩하게 되물었다. 덥다며 머리 위를 지나가는 망토를 치운 희준이 푸스스 웃었다.
"믿을까 말까?"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형원이 짐짓 심각하게 대꾸했다.
"진짜로. 나만 믿음 된다."
갑자기 진지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당황한 희준이 어설프게 웃었다. 사람 좋아보이는 전현욱도, 박지민도 다 속에는 칼 갈고 있는 놈들이다. 단호한 형원의 말이 뒤를 이었다. 도저히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말의 연속에 희준이 혼란스러워했다. 그런 희준의 모습을 서늘하게 바라보던 형원이 이내 얼굴표정을 펴고는 덧붙였다.
"밤에 공연 꼭 놀러 와라. 오면 재미있게 놀아줄게."
마지막 손가락 스냅에 희준의 머리 위로 화관이 씌워졌다.

"우와 이게 누구야."
예지가 탄성을 지르면서 희준의 옆구리를 쳤다. 괴기스러운 광대가 희준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광대에게선 오후 내내 경험했던 손길과 같은 느낌에 같은 향이 났다. 형원이? 조심스럽게 물어 본 희준의 시선이 광대의 옷차림으로 향했다. 형원이 컨테이너 속으로 끌고 가 보여준 그 옷 이었다. 그제야 경계를 풀어 낸 희준이 맑게 웃어보였다. 광대가 바르게 허리굽혀 인사를 하고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친구들의 손아귀에 이끌리듯 들어간 천막 속은 동화책 같았다. 서커스를 시작하기 전 예행연습 겸 기다리고 있는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줄 재주들이 이것저것 펼쳐지고 있었다. 저 쪽 구석에서는 귀엽게 생긴 강아지들이 톱니바퀴 위를 아무렇지 않게 질주하는가 하면
지민과 지민의 친구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공중에 매달린 그네를 타며 곡예를 선보이고 있었다. 아찔한 높이에 매달려있는 그네 위에 유유자적하게 앉아있는 지민은 고작 티셔츠에 멜빵바지 차림이었다. 양말은커녕 맨발로 허공을 가르며 놀았다. 재주에 완전히 시선이 빼앗긴 희준이 잠시 자리에 서서 지민을 구경했다.
열심히 구경을 하던 희준의 손을 누군가가 잡았다. 형원 못지않은 진한 메이크업을 얼굴에 얹고 있던 현욱이었다. 그 손이 유난히 뜨거웠다. 희준이 대꾸하지 않고 잡힌 손만 내려다보고 있자 머쓱해진 현욱이 희준의 손을 풀어주었다.
"천막 안 쪽 깊숙하게 우리 숙소가 있거든. 분장실 겸으로. 형원이 형 방에 가서 형 놀래켜 볼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는 거야."
"……."
"형원이 형이 내 얘기 듣지 말라고 했지? 그 형 장난을 너무 잘 친단 말이야."
현욱의 물음에 희준이 조용히 끄덕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대답인 듯 현욱은 그다지 기분나빠하지 않았다. 단지 난감하다는 듯 뒤통수를 연신 매만졌다.
"나쁜 짓 하는 거 아니구. 형원이 형이 원래는 새로운 사람들이랑 잘 안 지냈는데 너랑은 잘 지내는 것 같아서. 형 놀래키고 장난도 쳐 보고. 괜찮지 않을까?"
현욱이 희준을 슬슬 회유시켰다. 달콤하게 유혹하는 말은 흥미로웠다. 형원에게 자신이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희준이 볼을 붉혔다. 입에 발린 소리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듣기에는 좋았다.
"안 그래? 니가 싫으면 안 해도 돼. 끝나고 만날 수도 있긴 한데, 아무래도 공연도 끝나고 관객들도 배웅해야하니까 만나기 힘들 것 같아서."
미련 없다는 듯 돌아서려는 의도가 다분한 현욱이 말은 희준을 낚아채기에 충분했다. 뒤 돌아 사라지려는 현욱의 옷자락을 희준이 붙잡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표정을 싹 지운 현욱이 자신을 잡고 있는 희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화들짝 놀라 현욱을 붙잡고 있던 손을 거둔 희준이 시선처리를 하지 못하며 우물거렸다.
", 나 뒤에 들어가도 괜찮아?"
". 내가 들여보내줄게."
마음을 정한 희준의 대꾸에 함박웃음을 지은 현욱이 손을 잡고 이끌었다. 두꺼운 분장 때문인지, 조금은 어둡고 몽롱한 조명 때문인지 아니면 기분 탓인지, 현욱의 미소가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순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 현욱의 미소를 본 희준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그러나 다시 확인한 현욱의 얼굴은 영업용 미소가 생글생글하게 매달린 채 지나가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날리고 있었다. 잘 못 본 거겠지. 희준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로 했다. 하나씩 꼼꼼하게 따져본다면 애초에 이 서커스 자체에 의문을 품어야 했다.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트럼펫 소리가 천막 내에 울려 퍼질 때 희준은 현욱을 따라 구석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시끄러운 관객석과는 다르게 공연장 뒤는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아직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지 않은 탓에 희준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현욱은 자신을 들이밀다시피 구석에 데려다두고는 곧 자신의 공연차례가 다가온다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떠밀리듯 들어 온 공간은 매우 어두컴컴했다. 유일한 빛 공급 수단인 촉 낮은 전구 몇 개는 발 앞에 물건이 있는지 없는지 정도만 구분할 수 있게 만들었다. 갖가지 동물 탈이며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도구들이 난잡하게 널려있었다.
조금 깊숙이 들어가자 꼭 분장실과 같은 모양새로 여러 가지 방들이 밀집해있었다. 얇은 천 커튼으로 분리되어 있는 방들은 저마다 문패 하나씩을 달고 있었다. 익숙한 이름이 보이기도 했고, 도구들을 정리해두었는지 심플하게 대나무, 다트 와 같은 단어들이 달려있기도 했다. 지민의 이름이 달린 문패까지 찾긴 했는데 형원의 이름이 보이질 않았다. 몰래 숨어 있다가 깜짝 놀래키는 것이 목표였으나 이러다간 우왕좌왕하는 모습으로 형원에게 먼저 들킬 것만 같았다. 분명 현욱이 도움 없이도 찾아갈 수 있는 쉬운 구조라고 언급 했었으나 도저히 분간을 할 수 없는 환경이 저를 맞이하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에 희준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전등 빛이 잘 닿지 않았다.
한참을 헤맨 것 같은데도 무대의 뒤쪽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천막 속 공간이 이렇게 넓을 수가 있나? 희준이 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투덜댔다. 이젠 그냥 관람석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슬슬 커튼에 달린 문패를 읽는데 질릴 무렵, 그토록 고대하던 이름 석 자가 희준의 눈에 띄었다. 채형원. 희준이 조심스레 커튼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천이 펄럭임과 동시에 먼지 묵은 냄새가 살짝 베여 나왔다. 간질거리는 코를 감싸 쥐고는 슬쩍 머리를 안쪽으로 들이밀었다. 안 그래도 낮은 촉의 전구가 커튼에 가려 빛이 잘 들어오지 못했지만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시야확보를 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큰 거울달린 화장대와 난잡하게 어질러진 색조 화장품들. 싸구려 향수와 갈기갈기 찢긴 휴지조각들. 한쪽 벽에 잔뜩 쌓여있는 박스들까지 딱 형원의 분위기가 나는 곳 이었다. 희준이 커튼 바로 옆에 세워진 옷걸이를 눈으로 훑었다. 처음 만난 날 입고 있던 셔츠와 바지가 걸려있었다. 요상한 페도라 모자와 광대가면까지 확실하게 형원의 것 이었다. 손가락이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소매를 잡아당길 때 즈음 누군가가 희준을 잡아채고는 막사 안으로 몰았다. 구석까지 몰린 희준은 순간 당황했으나 익숙한 체향에 긴장을 풀었다. 형원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채로 희준을 내려다봤다. 막 씻고 돌아 온 모양인지 받쳐 입은 셔츠와 왁스로도 잠재우지 못한 잔머리들이 물에 푹 젖어있었다. 형원이 거친 목소리로 희준을 몰아갔다.
"니 와 여기 있노? 어떻게 왔는데? 전현욱이가? , 미치겠네 진짜."
"아니 나는 응원, 너 놀래켜줄라고……. 현욱이가 괜찮다구……."
형원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화장기는 가셔 있었으나 시꺼멓게 칠한 눈두덩이는 물이 잘 빠지지 않아 여전히 강렬했다. 그만큼 인상도 많이 굳어져보였다. 물에 젖어있는 앞머리를 대충 털어내던 형원이 희준을 밀치고는 급하게 제 막사 안쪽으로 들어갔다. 큰 손이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짐덩이를 뒤졌다. 두툼한 담요를 꺼낸 형원이 희준을 그 속에다가 둘둘 말았다. 이목구비만 겨우 보일정도로 가리고는 담요 밑으로 삐져나온 손을 잡아챘다.
"여가 어덴 줄 알고 함부로 기어들어오노. 내가 나 말고는 아무도 믿지 말랬제. 박지민도, 전현욱도 속에 칼을 품고 있다 했잖아."
"근데 걔네는 널 믿지 말라고, 장난 많이 치는 애라고……."
"지금 나보다 걔네를 더 믿어?"
흥분하면 표준어를 쓴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질투로 보였을 법 한 말투였지만 늘 웃고다니던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으니 분위기가 달랐다. 형원이 담요를 뒤집어 쓴 희준을 끌고 막사를 나섰다.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무대 뒤편으로 돌아오는 모양인지 고요했던 복도가 점점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급하게 주변을 살피던 형원이 들어온 입구의 반대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깊숙히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쓰지 않는 물건들이 상자 째로 쌓여있는 탓에 발 디디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낮은 촉의 전등 빛이 닿이지도 않을 무렵, 낮은 목소리가 둘의 발목을 잡았다.
"새로 데려온 건가? 잘 골랐어."
낮다고 생각하는 형원의 목소리보다 훨씬 더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듣기 좋은 중저음이 아니라 두려움에 떨게 만들 목소리였다. 형원이 본능적으로 희준을 제 뒤에 숨겼다. 경계적인 태도에 희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길을 잘 못 든 아이입니다."
단호하게 대답하며 형원이 희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팔목을 거세게 쥐는 악력에 희준이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주변 기운이 점점 더 서늘해짐이 느껴졌다.
여기에 발을 들인 이상, 나가는 것은 자유롭지 않은 거 너도 알 텐데.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의 향연에 희준이 눈을 굴렸다. 어둠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눈이었지만 이젠 칠흑같은 어둠 뿐이었다. 바로 제 앞에 서 있는 형원의 등판만 흐릿하게 느껴질 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멀리에 어렴풋이 서늘한 계열의 빛이 느껴졌다. 오는 길에 걸려있던 낮은 촉의 전구들과는 또 다른 느낌의.
"제가 도로 내보낼 겁니다."
형원의 반응에 알 수 없는 목소리가 호통 치듯 웃었다.
"너에게 그 정도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조롱하듯 목소리가 울렸다. 형원의 손이 희준의 손을 찾아 깍지를 꼈다. 쉬어버린 목소리를 내기 위해선 성대를 긁어내는 노력이 필요했다. 희준과 맞붙잡고 있는 손 사이로 땀이 채였다. 긴장한 티가 역력했지만 최대한 표출하지 않기 위에 자기 자신을 억눌렀다. 형원이 혀로 메마른 입술을 적셨다. 아까 발랐던 싸구려 립스틱의 맛이 혀 끝으로 옮겨왔다.
"힘은 없지만 거래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거래? 네가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형원이 낮게 웃었다. 잔뜩 쉬어버린 목이 섬뜩한 분위기를 돋구었다. 잠시 발치를 바라봤다가 허공을 바라보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에 걸려있는지 시간을 끌었다. 간간히 서커스 무대에 환호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형원이 희준의 손을 고쳐잡았다. 잠시 손 틈으로 스며든 바람이 둘의 결합을 차갑게 식히고 지나갔다. 음침한 목소리가 희준을 그 애라고 칭하며 형원에게 경고했다.
"그 애를 위해 자신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
". 다른 애들처럼 모든 걸 내어주면 됩니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답한 형원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희준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는 가늠이 잡히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자신을 위해 형원이 본인을 희생시켰다는 것 이었다. 희준이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지만 형원은 아랑곳 않았다.
고민을 하는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형원이 살짝 고개를 젖혀 희준에게 속삭였다. 가자. 조심스레 발을 뒤로 디딘 형원이 희준을 잡아당겼다. 자리에 붙박혀있던 희준이 형원에게 이끌려 주춤주춤 자리를 떴다. 낮은 목소리가 계속해서 귀에 이명을 남겼다. 채형원이라는 팻말이 달린 천막을 지나갈 때 즈음, 형원이 달리기 시작했다. 잡혀있던 손에 이끌려 희준 역시 발걸음을 빨리 놀렸다. 들어오기까지 한참이나 걸렸던 미로 같은 무대의 뒷편을 순식간에 빠져나갈 수 있었다. 여즉 환하게 비추고 있는 서커스 무대는 이제 전 출연진이 올라가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있었다. 무대를 빠르게 훑던 희준의 눈에 현욱이 잡혔다.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현욱이 붉게 칠해진 입술로 호선을 만들며 작은 은장도를 꺼냈다. 가벼이 날아간 은장도는 판자 위에서 곡예를 하고 있던 지민의 손에 칼이 잡혔다. 손가락 사이에 끼인 칼이 불빛을 반사시켰다. 희준의 걸음이 느려졌음을 깨달은 형원이 깍지 낀 손에 힘을 주고는 세게 잡아당겼다. 천막을 통과하자 서늘한 밤바람이 둘을 맞이했다.
손을 붙잡고 부리나케 달렸다. 서커스는 공연 막바지에 다다랐는지 함성과 폭죽 터지는 소리로 한가득 이었다. 동네사람들이 모두 천막을 방문했는지 골목길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거리의 집들은 모두 작은 불이 켜져있거나 아예 꺼져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희준이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길을 알려주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형원이 훨씬 빨랐다.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골목에서 어디로 꺾어야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보통내기가 아님을 방금 깨닫긴 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었다. 희준의 집 역시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형도, 엄마도 아무도 집에 없었다. 대문앞까지 달려간 희준이 문을 열기를 망설였다. 둘 다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문을 여는 순간이 바로 이별이라는 것을.
"희준아. 내 담에 꼭 찾아올게. 이거 잃어버리지 말아."
형원의 손이 손수건을 더욱 꽉 묶으며 말했다. 희준은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고개만 끄덕일 뿐 이었다.
"내 잊으면 안 된다."
"너를 어떻게 잊어."
희준이 손목에 두른 손수건을 흔들어 보이며 칭얼거렸다. 멀리서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에 촉박한지 형원이 골목 아래와 희준을 번갈아 바라보며 발을 굴렀다. 뜨고 싶지 않아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 형원이 별안간 손으로 희준의 눈을 가렸다. 왜 가려?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것이 괜시리 사람을 서럽게 만들었다. 눈을 가리고 있는 형원의 손이 희준의 눈물에 젖어들어갔다. 표현하기 힘든 불안함과 감정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희준이 손을 뻗어 형원의 얼굴을 만지려고 했지만 잡히는 것이 없었다. 시야는 여전히 형원의 손이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형원아."
희준이 나지막하게 형원을 찾았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엄마, 형원이 안 왔어?"
"누구?"
"채형원. 그 서커스단 광대."
"얘가 잠이 덜 깼나, 뭐래?"
"형원이가 아침에 온다구 했어."
"채형원이가 누군데? 니 친구들 중에 그런 애가 있어?"
언제 잠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요란한 알람소리에 이끌려 눈을 뜬 희준은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방바닥에 어제 입고 있던 옷들이 뱀의 허물처럼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양치를 할 요량으로 들어간 화장실에서 여태껏 손목에 묶여있던 손수건을 확인했다. 머릿속에 형원과 어젯밤의 일이 스쳐지나갔다.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마루를 가로지은 희준이 속사포 같은 질문을 쏟아냈다. 희준의 어머니가 들고있던 국자로 국을 저으며 희준을 쫓아냈다. 얼결에 화장실로 다시 직행하게 된 희준이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기억을 회상했다. 분명, 형원이 자신은 집 앞까지 데려다주며 다시 보자고 속삭였었다. 아직까지도 도둑고양이 같은 뽀뽀가 입술 위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괜스레 얼굴에 열이 오른 희준이 입술을 감쳐물었다.
"형원이 안 왔어? 안 왔어?"
"아니 얘도 참. 처음 듣는 이름을 들먹이면서 왜 그런데. 꿈을 심하게 꿨나."
"꿈 아니야. 이거 준 앤데……."
희준이 팔목을 들이밀며 말했다. 독특한 문양의 손수건이 형원이 매어줬던 그대로 손목에 달려있었다.
"어머, 그거 어디서 났니? 엄만 처음 본다."
"엄마 장난치지 말고오."
"진짜야, 희준아. 엄마는 형원인지 형언인지가 누군지 모르고 이것도 처음 본다."
희준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는 형원을 기억하지 못했다. 진실을 말하고 있는 두 눈에 희준이 큰 혼란을 느꼈다. 아들, 괜찮아? 희준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하는 것을 눈치 챈 어머니가 물었다.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 희준이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엄마. 그 공터에 왔던 서커스단 갔어?"
"서커스단이라니?"
도저히 희준의 말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애초에 서커스단은 존재도 하지 않은 것처럼 구는 모습에 큰 혼란을 느꼈다. 분명 어젯밤에 모든 동네사람들을 서커스 공연에서 만난 기억이 있었다. 현욱의 속셈에 휘말려 공연장의 뒤편도 구경하고, 화가 난 형원의 모습도 보았었다. 마지막까지 오싹한 모습을 보여준 현욱까지. 만약 꿈이었다면 손목에 매달린 손수건은 사라져야 했다. 크게 혼란을 느낀 희준이 기억을 되짚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은 공터를 메우던 컨테이너트럭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정작 공연을 제대로 관람하지 못한 제자신이 공연을 끝까지 관람하고 왔을 어머니보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지와 현식이 부질없는 것으로 말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왜 나 어제 두고 갔어?"
"뭘 두고 가. 우리 어제 어디 간 곳이 없는데."
"서커스에서 니네끼리 사라졌잖아."
"무슨 서커스? 김희준 꿈 꿔?"
예지가 되물었다. 대충 분위기를 파악하게 된 희준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동네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커스라는 것이 사라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두가 이런 반응을 보이진 않을 터 였다.
희준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운동장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멀리 보이는 공터역시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 텅 비어 있었다. 버릇 적으로 희준이 손목을 매만지다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곱게 접어 넣었던 손수건의 부드러운 천이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형원아.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렀던 것이 기억났다. 희준이 입 밖으로 이름을 한 번 불러보았다.
"채형원."

<수상소감>
사실 저는 태어나서 서커스를 본 적이 없습니다. 서커스단이 들어오지 못하는 오지에서 유년기를 보냈었고, 머리가 조금 큰 다음 대도시에 상경했을 때 즈음엔 이미 서커스는 옛날이야기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서커스라고 하면 저에게는 또 다른 세상 같다고 느꼈고, 동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글을 쓰게 된 계기도 그렇습니다.
원고를 최종적으로 제출하기 직전까지 꼭 3명의 친구들에게 퇴고를 부탁했습니다. 글을 쓰면서 몇 십번씩 다시 읽어본 까닭에 스스로의 글에 질려가던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사실 타인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제 글은 스스로만 퇴고하고, 스스로만 품어가던 것 인지라 그렇게 퇴고를 부탁하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3명의 친구는 각자 다른 평을 내놓았습니다. 가지각색의 평이 돌아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평이 좋지 않다면 제출하기를 접으려고 했는데, 흥미로운 평을 많이 받았더니 더 큰 욕심이 생겨버린 듯 합니다.
이 글을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읽게 될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저 글을 읽어주셨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고 있으며, 동시에 쑥스러움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중 입니다.
저만의 서커스 뼈대를 만들어 낸 기분입니다. 주춧돌을 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 0 ]
댓글 서비스는 로그인 이후 사용가능합니다.
댓글등록
취소
  • 최신순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