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회 한성문학상 - 소설 가작> 워너비

    • 입력 2017-12-04 00:00

글: 이정민(한국어문 3)
그림: 김지윤(회화 2)


4월의 달콤한 빗줄기는 3월의 가뭄을 꿰뚫고, 세상 모든 줄기가 생명력의 물기로 흥건히 적셔진다. 그리하여 들꽃들은 피어난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은 그의 달콤한 입김으로 들녘과 작은 숲의 연한 가지들에 한 해를 이겨낼 강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바람은 못내 숨어있던 마음을 자극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새들은 노랫소리를 쉴 새 없이 지저귄다. 새벽의 기나긴 여정 가운데 이제 막 지나고 있을 뿐이며, 성자가 수난을 당할 때 제자의 마음을 흔들어 깨운 고고한 종족이 곧 울부짖을 시간이다.
 
*
네가 아까웠어. 더 좋은 애 만날 거야.
친구들은 나를 위로하며 술이나 마시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술 마시며 생각했다. 과연 더 좋은 건 뭐지? 그런 애는 언제 만나는 거야? 그가 없이도 이 세상은 돌아간다고. 내가 없어도 역시나 이 세상은 돌아가고.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도는 게 아니니까. 나 같은 건 죽어도 일부 사람들에게 기억될 뿐, 내가 죽어도 경제가 심하게 요동친다든가, 주식시장이 폭락한다든가, 테러가 일어난다든가. 그럴 일은 없다. 지금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지금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도 언젠가 사회 속에 묻혀 지금의 일들을 추억으로만 여기고 끝낼 것인지를. 당장 내가 없더라도 이 녀석들 삶에는 지장이 없겠지.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건 참 시시하다.
 
*
공짜로 생긴 영월 꽃축제 티켓을 얻어 남자친구를 데리고 갔건만 전혀 즐겁지 않았다. 꽃이 저리도 많이 피었는데 나는 향기라고는 바람 냄새밖에 없을 수 있을까. 심지어 꽃들도 자기들 부모의 돈을 벌어주려고 억지로 개화한 느낌이었다.
영월 꽃축제라고 쓰여 있는 플랜카드가 들어가는 입구 위에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각기 색으로 예쁘게 핀 꽃과는 너무나 대조되게 얼굴을 잔뜩 찡그린 까만 꽃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왜 이리 인간들이 많은 거야!
내가 버럭 화를 내자 사방에서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집에서 영화나 보자니까.
그는 짜증나는 어조로 내게 화를 내듯이 말했다. 물론 나는 돈을 내지 않았지만 돈을 내고 온 사람은 하나같이내 돈이라고 울부짖을 것 같았다. 이건 마치 고등학교 때 강당에 전교생 모아 놓고 몇 시간동안 앉혀서 재미도 없는 공연을 보여주는 이름만 축제인 축제 같았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그래도 이왕 온 김에 그와 사진도 찍고 나 잡아봐라, 같은 유치한 추억거리는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그나마 사람이 별로 없는 외진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외진 곳이라 해봤자 간신히 꽃만 만질 수 있을 뿐이었다. 몰래 꽃을 하나 따서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킁킁 소리가 나도록 맡았지만 별다른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러다 알게 된 사실은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짜티켓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옆 사람의 절반 정도 잘린 티켓을 무심코 보았는데 삼 일간 무료입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 그러니까 나는 혼자 공짜로 들어왔다고 굉장히 좋아했던 것이다. 그래, 어쩐지 인간이 많다 했다. 나는 그 더러운 기분을 안고 두 시간이나 더 있다 집에 왔다. 그리고 그는 나와 다툰 뒤 집을 나갔다.
 
*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버스 창가에 기대어 그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연결음은 처음엔 들리지 않았다. 곧 그의 컬러링 소리가 들렸다.얼굴 찌푸리지 말아요라는 노래가 귓구멍을 무겁게 눌러왔다. 도저히 이어폰을 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핸드폰을 손바닥에 내버려둔 채,연결 중이라는 글씨를 무기력하게 응시했다. 연결 중 표시는 일 분이 넘게 이어졌다.
순간 강한 불신이 들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별 것도 아닌 물체가 전혀 다른 공간에 있는 나와 그를 이어준다는 건 새빨간 거짓임이 틀림없다. 기계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과학이란 종교의 힘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도시의 혈관처럼 허공에 즐비한 전화선들은 모조리 눈속임일 것이다. 통신망은 내가 원하는 사람을 찾아줄 수 없다. 사실, 핸드폰으로는 물질적으로 같은 공간에 존재 하지 않는 사람들을 연결시킬 수 없다. 지금 그와 내가 함께 있지 않다는 단절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술은 없다.
어디?
거의 다 왔어. 조금만 기다려.
그동안 나눈 가벼운 통화들은 언제든 통화 버튼만 누르면 그를 만날 수 있다고 착각하게끔 했다. 그 얄팍한 연결을 어떻게 믿고, 안심할 수 있었을까. 정작 목소리를 듣고 있는 순간조차도 나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는데.
어쩌면, 그동안 핸드폰으로 들었던 그의 목소리도 실은 그가 말하고 있던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이를 테면, 통신사들은 모두의 목소리를 복제했고 우리가 전화를 걸면 거짓 목소리로 녹음된 내용을 들려주는 거지. 당신들이 찾는 사람은 여기 있으니, 더 이상 궁금해 할 필요 없다는 듯 연결을 보채는 우리를 안심시키고, 당장의 급급한 갈증을 채워 아무도 자신들의 얄팍한 관계를 의심하지 않도록.
서로가 찾는 곳에 서로가 존재하고 있다는 마약 같은 환상에 취해 연결감에 대한 우리의 예민함은 마비되고, 관계는 소비적 소통 속에 소모되고, 결국 오늘 같은 날에야 깨닫는 것이다.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상대가 받지 않는 날이 온다는 사실을.
덜컹.
귀를 막아 둔 이어폰 역시 무릎 위로 떨어졌다. 주우려고 고개를 숙이니 어지럼이 밀려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화면은 자동으로 통화가 종료되었다.
나는 핸드폰을 그의 손이라도 되는 양 꽈악 움켜쥐었다. 받을 것을 기대하고 걸진 않았다. 단지 마음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순간순간을 견디기 위해 기계적으로 같은 동작을 반복했을 뿐이다. 이 바보 같은 전화기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동아줄처럼 손에 쥐고 있어봤자, 그를 만나게 해주지 않는다. 그가 내 눈 앞에 없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너무도 먼, 알 수 없는 곳에 그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그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는 주소록에 있는 아무에게나 전화를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나는 비틀거리며 몇 번이나 벽을 짚었다. 그때마다 누군가 나를 부축한 기억이 났다.
 
*
내 아침은 엎드려있는 모습을 느끼는 것에서 시작된다. 숨이 막히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베게에 코를 박고 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심해한다. 어젯밤을 같이 보낸 남자가 자고 있었다. 얼굴을 확인했다. 나를 위로해준 친구 중에 한 명이었다. 목소리가 커서 떠올랐다. 술자리에서 늘 웃고 있었던 녀석이다. 웃는 모습이 쿼카라는 동물처럼 생겼던 걸로 기억났다.
몸을 일으키니 간밤의 불편한 자세로 인해선지 목 뒤가 뻐근하다. 고개를 좌우로 휘젓자 박자에 맞춰우두둑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아픈 듯이 목을 주무르자 묘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동안 그 기분을 음미하는 것은 아침을 활기차게 시작하는 매우 중요한 의식이다. 나는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역으로 향했다. 붐비는 역사 속에서 사람으로 가득한 곳을 헤집고 나아가 승강장으로 갔다. 적당히 타이밍을 재다가 막 열차가 출발하는 타이밍에 개찰구를 지나 승강장으로 갔다. 잘 하면 맨 앞에 설 수 있다. 반드시 맨 앞에 서야한다. 그래야만 앉아서 탈 수 있기 때문이며, 열차에 머리를 들이미는 상상을 좀 더 실감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열차가 다가왔다. 주변의 소음과 함께 온몸으로 퍼지는 심장소리가 매우 경쾌하다. 노란선 앞으로 한 발 내밀었다. 스크린도어라는 것이 없었으면 머리를 밖으로 내밀었을 것이다. 그럼 조금만 있으면 다가오는 열차가 내 머리를 치고 지나갈 것이고 나는 몸을 떠나 멀리 비행할 것이다. 나는 아쉬워하며 스크린도어 안으로 열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한껏 음미한다.
지하철에 앉아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숨 가쁘게 무언가를 한다. 핸드폰을 보는 사람, 신문을 보는 사람, 책을 보는 사람 등. 다들 무언가를 보고 있다. 무언가에 매달려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다. 나는 상상을 즐긴다. 무장 강도가 들어와 사람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하고 사람들은 쓰러진다. 그 중 한 발이 내 이마에 꽂혀 나도 쓰러지는 상상 말이다. 그러다보면 시간은 어느새 빠르게 흘러가있었다.
면접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기에 주위를 둘러보기로 했다. 발산 역에서 내려서 길게 생각할 것 없이 걸었다. 지원서 넣기 전에 회사 근처를 찾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발산 역에는 맛집이 많다던데. 갈빗집에서 풍겨나는 냄새는 괜히 기분을 들뜨게 하기엔 충분했다. 걷다보니 새로 짓는 건물들, 리모델링하는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렇게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보면 돈 많은 선글라스 낀 여인이 푸들을 산책시키고 있을 것만 같았다.
걷다 보니 등촌근린공원이라는 곳이 나왔다. 근린공원은 어디에나 있는 것 같다. 천호에도 근린공원이 하나 있는데 풍납토성에도 옆에 풍납근린공원이라고 있다. 몇 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매번 오는 할아버지들만이 매번 같은 장기만 두면서 나를 보며 수군거렸다. 너무나 시시하고 지루한 일이었다. 근린공원이란 프렌차이즈가 있는 건가? 어디에나 있다. 근데 근린이 무슨 뜻이지?
벤치에 앉아 있다 보니 건너편 벤치에 앉아 있는 회색 투버튼 체크무늬 재킷을 입은 여성이 눈에 띄었다. 그 여성은 조금 누런 얼굴에 안경은 쓰지 않았다. 머리는 꽤나 길었고 말랐다. 그녀는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평범했다. 이게 그녀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단정한 옷차림의 여성이 점심시간에 공원에서 혼자 앉아 있는 게 내겐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 평범해서 평범한 사람을 관찰하고 있는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잠시 하늘을 쳐다보더니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뒤이어 따라가려고 마음먹었다. 나도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그녀를 향해 걸었다. 물론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걸었다. 쉽게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그녀는 어느 건물에 들어갔다. 이름을 보니 출판사 같았다. 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녀와 내가 비슷한 점이 있어서 무엇인가 기분이 묘했다. 나는 당초에 목적대로 면접장을 갔다.
 
어디?
 
쿼카의 문자였다. 이제야 일어난 모양이었다. 나는 면접장으로 지정된 회의실 앞 복도에 앉아 있었다. 주변엔 다른 대기자들이 각자 다른 모습으로 면접을 준비하고 있었다. 눈 감고 무언가 중얼거리는 키 큰 남자, 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다시금 고치는 여자, 무언가 두툼히 준비한 남자……. 나처럼 한가하게 핸드폰을 딸깍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면접 중
 
답장이 오지 않았다. 전화를 할까 했지만, 내 순서가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아 그만 두었다. 이런 곳은 면접이 길지 않았다. 유아, 초등, 고등을 대상으로 독서교육을 하는 출판사였는데, 그리 유명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끝나고 전화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후 내 번호가 불렸고, 호명된 몇 명과 같이 들어갔다. 빈 의자가 몇 개 있었다.
번호대로 앉으시면 됩니다.
분위기는 까다롭지 않았다. 나와 같이 호명돼서 들어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시원찮아 보였다. 뻔한 질문에도 우물거렸다. 상대적 우월감 덕분일까. 면접 내내 기분이 괜찮았다. 면접장을 나서면서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자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합격하는 게 불합격하는 것보다 더 찝찝할 수도 있다. 나는 쿼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잘 했어?
쿼카는 태연하게 물어봤다. 그게 첫마디였다. 그는 여태껏 내 방에 있었다. 내 기척에 그제야 막 잠을 깬 듯 했다. 뭘 잘했다는 건지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잘 잤어?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 밥 먹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생각해보니 아침 일찍 나가서 먹은 게 없었다. 찌개류가 먹고 싶었다.
돈까스.
그는 어기적어기적 일어났다. 그는 쑥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알 수가 없었다.
…….
굳이 말하진 않았다. 어젯밤엔 어땠을까?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커튼이 펄럭거렸다.
맞다. 아까 면접 보기 전에 말이야.
묘한 어색함 속에서 나는 마치 할 말을 찾은 듯 침묵을 깼다.
면접 보기 전에 시간이 남아서 공원에 앉아있었는데, 어떤 여자가 반대편 벤치에서 있는데 어찌나 평범해 보이던지…….
아니, 전혀 평범하지 않은데? 되게 이상하잖아.
한동안 얘기를 듣던 쿼카는 그렇게 대꾸했다. 그도 나만큼 어색해서 어떻게든 대답하려는 게 아닐까.
횡설수설. 실없이 꺼냈던 얘기는 면접에 대한 얘기, 그 여자가 이상하다는 얘기까지.
쿼카, 면접, 그녀가 뒤섞였다. 중요한 건 쿼카가 전날 밤의 자초지종 따위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방바닥에는 이불이 남아있었다.
재밌겠다. 나도 다음에 보러 갈래.
그 이후 한동안 쿼카는 바쁜 삶을 보냈다.
 
어디?

내가 가끔 문자나 전화를 해도 쿼카는 회사에서 야근하거나 컴퓨터활용능력 따위의 자격증을 딴다며 학원에 있었다. 나는 매일 잡코리아나 사람인에 들려서 쓸 만한 회사를 찾아다녔다. 근처에 맛집을 찾아보고 연봉을 조사하고, 욕을 내뱉고. 어쩌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해당 입사지원서를 다운로드해서 후다닥 이력서를 만들었다.
이력서를 작성하면 대개 면접을 보러 오라는 문자를 받는다. 회사에서 원하는 건 학교가 굉장히 좋은 것도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니다. 얼마나 회사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냐는 것이다. 나는 학교도 좋고 성적도 좋았지만, 경력 사항에는 공백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노예다. 노예이기를 애써 거부하는 노예.
 
*
이번에 연락 온 회사는 장한평에 있는 출판사였다. 장한평 근처에 괜찮은 곱창 집이 있다고 해서 제일 마음에 들었다. 내친김에 관련검색어로 뜨는 것들을 차례로 클릭했다. 늘 그렇듯 이런저런 페이지를 돌아다니는 사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한때는 이런 식으로 평생 검색만 하면서 살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누군가가 인터넷만 돌아다녀도 알 건 다 알 수 있어서 공부라고 했는데, 이젠 누구나 인터넷이 생활이 돼 버렸기에 상식의 상한선이 대폭 올라가버렸다. 어느 정도는 공감이 되는 말이다.
나는 장한평으로 면접을 보러 갔다. 쿼카는 회사에 출근했다. 나는 항상 넉넉하게 출발하기에 시간이 남았다. 나는 또 걷다가 근린공원을 발견했고 그녀도 발견했다.
처음에 나는 그녀가 무슨 스토커인가 생각했지만,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혼자 웃었다. 그럼에도 이 넓은 서울에서 또 마주친 것이 신기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제외하면 그 날과 판박이였다. 머리카락은 잘랐는지 가지런히 모여 있었다.
그녀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하늘을 한 번 슥 본 뒤 일어났다. 나도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녀가 멀어질 무렵에 조심스레 일어나서 따라갔다.
그녀는 건물에 들어갔는데 그 건물은 내가 면접 볼 장소였다. 내 경쟁자인가? 그녀는 나보다 빠른 번호였고 나왔을 때는 다른 급한 일이 생긴 것 마냥 어디론가 황급히 갔다.
면접은 오리무중이었다. 쥐를 닮은 면접관이 있었고 따지는 게 꽤나 많았다. 인터뷰 도중 내 이름을 틀린다거나 다른 사람의 스펙을 내 스펙으로 오해했다. 면접이 이런 수준이면 합격하더라도 갈 생각이 싹 사라진다.
나는 면접이 끝나자마자 그녀를 찾기 위해 건물 밖으로 황급히 나갔다. 당연히 그녀가 진작 갔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또 그녀를 따라나서기로 결심했다. 할 것도 없었기에 집으로 바로 가지 않았다. 집에 가봤자 빈둥거리며 이력서에 적을 것은 없나 고민하다 TV를 보고 인터넷을 하다 잠자리에 들 것이다.
그녀는 지하철을 탔다. 왕십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탔다. 주로 학생들이 많았는데 덕분에 술자리처럼 시끌시끌해졌다. 나는 지하철만 타면 학창시절 때를 떠올리게 된다. 매일 아침 반복되는 굴레라고 생각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은 별것도 아닌 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옆칸으로 이동했다. 생각 외로 이 미행이라는 게임은 재밌었다. 영화나 소설에선 쉽게 들키지만, 현실적으론 조금만 조심하면 절대 들킬 수가 없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자신을 뒤쫓을 거라고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면식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대놓고 따라간들 그녀가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충정로를 지나 여의나루에서 그녀는 하차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그녀는 걸음이 느렸기 때문에 잠깐만 방심해도 그녀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기 일쑤였다. 하나 뿐인 길 위에 우리 둘만 있었다. 만약 그녀가 한 번이라도 뒤를 돌아봤다면, 우리는 쉽게 마주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한 번 그녀가 돌아보길 바랐다. 그랬다면 이 게임은 쉽게 끝났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따라가는 걸 눈치 채지 못했음은 분명했다. 나는 그녀를 계속 쳐다보면서 걸었지만, 그녀는 별 볼일 없는 물가를 쳐다보며 걷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날의 시간이 멈췄다고 생각된 건 어느 벤치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벤치에 앉아 물가를 보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그녀를 지켜봤다. 어찌 보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이 거리엔 몇 사람 없었고 누굴 기다려서 저녁을 먹거나 조깅하기엔 너무나 애매한 시간이었다. 나는 그녀 옆을 지나쳤다. 하지만 그녀는 나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보지도 않았다. 단지 물가 쪽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얼핏 보면 그녀는 근처에서 산책 나온 사람 같았다. 벤치에 앉아서 단정한 정장의 여성이 강가에서 혼자 앉아 있는 게 전혀 이상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쿼카가 이상했다. 이 시간에 정장 입은 여성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있는 것이 정말 이상한건가? 왜 이상하지? 나는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여전히 물가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와 나 사이엔 아무것도 없었다.
 
*
해질 무렵, 집에 돌아오니 쿼카가 있었다.
어디 갔다 와?
그는 노트북 앞에 앉아 무언가를 두들기고 있었다.
그냥. 잠시 나갔다 왔어.
나는 대충 둘러댔다.
잘 됐어?
쿼카는 내가 뽑아놓은 이력서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냥.
힘내.
조언 좀 해봐.
나는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다. 다행히 쿼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열심히 하라고만 했다.
영화 보러 가자.
어차피 저기서 다 나오잖아.
나는 TV를 가리키며 말했다. TV에선 88만원 세대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N세대, 88만원세대, G세대, W세대……. 나이 간에 거리감만 생기는 거 같아. 어차피 다들 힘든데 말이지.
그거나 그거나지.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래도 저런 게 면접에 나올 수도 있잖아. 좀 관심을 가져봐. 다음 주부터 전국이 장마권에 들어간대. 장마권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시작한다고 하고. 기상학적으로 한반도가 아열대로 변했다는 보도도 있어.
아열대가 되면 안 좋나?
나는 귀찮은 듯 대꾸했다.
, 가을이 사라지겠지.
근데?
근데라니? 사계절이 사라지잖아?
별로 와닿는 말이 아니었다.
그럼 어때. 어차피 시시해.
시시하다니. 언젠간 봄이나 가을을 그리워할 때가 올거라구.
그날 밤도 여느 밤들과 다르지 않았다. 평범한 밤이었다. 우리는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보며 잠을 청했다.
 
*
쿼카와 나는 과일 코너를 지나고 있었다. 시식대 앞에서 직원이 바나나를 잘게 썰고 있었다.
이게 필리핀에서 온 건데 비타민도 풍부하고 당도도 높아서 엄청 맛있어요. 다이어트에도 좋고 건강에도 좋아요. 안 사셔도 되니까 한 번 드셔보세요.
직원은 저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모르는 걸까. 쿼카는 나를 조심스레 툭툭 찔렀다. 쿼카는 시식대에서 부끄러워했다. 나는 쿼카의 몫까지 바나나 두 조각을 집어 들었다.
쿼카는 카트를 꺾었다.
돈까스 먹고 싶다.
나는 돈까스를 집어서 카트에 넣었다. 쿼카는 그 날 이후 평범한 그녀에 대해 완전히 까먹은 듯 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 여의나루까지 간 일에 대해 쿼카에게 말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이상하다는 점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영영 이 게임을 끝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면, 돈까스, 냉동식품 몇 개를 사서 우리는 계산대 앞에 섰다. 쿼카는 카트에서 계산대로 상품들을 옮겼다.
근데 어제 면접 끝나고 뭐 했어?
나는 지갑을 꺼내며 물었다. 쿼카는 아무렇지 않을 듯 나를 봤다.
그냥 잠시 돌아다녔어. 친구도 보고.
내가 아는 애야?
말하면 알아?
쿼카의 얼굴은 태연했다. 나는 평범한 그녀에 대해 얘기할까 했다. 그러나 나는 말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어느 비 오는 날, 나는 면접을 본 후 집에서 이력서를 다듬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옆에서 비슷한 작업을 하는 쿼카가 말을 걸었겠지만, 그날은 고요했다. 쿼카는 사소한 일로 다툰 뒤 홀랑 집을 나가버린 상태였다. 걱정이 됐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직도 화났다든지 우리 둘 다 잘못한 게 없다고 보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최근에 쿼카와 다투는 일이 잦았다. 서로 다툴 때면 쿼카는 며칠간 집을 비웠다가 돌아오는 식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불편한 기운이 감돌 때 서로 떨어져 있는 건 제법 현명한 방법이었다.
나는 괜히 발 닿는 대로 마냥 걸었다. 자연스레 동네 놀이터를 지났다. 나는 빗물이 흥건한 그네에 앉았다. 앞뒤로 끄덕끄덕. 바람이 불고 있었다. 긴 바람이었다. 그것은 한 번에 몰아치지 않고 천천히 흩어지듯 모이더니 주변에서 맴돌았다.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는 분명 평범하다.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한 그가 이상하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그녀는 내 앞에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우린 조금씩 겹쳐졌다. 뜨거운 밀도. 숨도 말도 필요가 없이 서로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오롯이 서로만을 가득 담아내는 눈동자. 나는 그녀를 쓰다듬어주고 목덜미를 스쳤다. 그녀는 내 쇄골에 얼굴을 기대고 내 목을 깨물었다. 따끔하고 빨려드는 느낌. 나는 그녀에게 바싹 고개를 붙이고 숨소리를 잘 들리게 냈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녀의 볼을 쓰다듬자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나오는 웅얼거림. 각자의 소리는 서서히 하나로 이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우린 서로를 탐했다.
매료되지 않을 수 없는 그녀의 조각들. 그녀와 맞닿은 부분에선 뜨거운 불길로 잠식당하는 것만 같았다. 자잘한 떨림을 내는 그녀의 숨결은 어느새 살아있음 그 자체였다. 그녀의 숨결은 내 팔을 스쳐지나 어느새 어깨, 그대로 날개뼈를 찾아갔다. 그녀는 나를 태워버리고서야 잦아들 수가 있을까. 목에 매달리듯 건 팔이 그리는 선이 아득하게 고왔다. 그 선의 끝을 따라가면 내겐 먼 곳을 쳐다보고 있을 그녀가 있었다. 그녀에게 노크하자 부드럽게 휘어지며 문이 열렸다.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끌어 올렸다. 그녀는 몸을 비트는 것에 힘을 주며 내 손을 잡으며 파고들었다.
품 안으로 들어오는 그녀를 느끼며 척추를 더듬고 내려가는 손가락. 그녀는 간지러운 듯 몸을 뒤틀더니 손가락이 깍지를 끼고 들어왔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맞잡고 다시 입을 맞췄다.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내 입가에 미소가 매달렸다.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감았다가 풀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그게 세상에 남은 마지막 숨인 양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모래바닥에 누워있었다. 오로지 차갑고 황량한 모래뿐이었다. 모래를 잡으려 했으나 손에서 부서져 흘러내렸다. 한 줄기의 빛조차 흐르지 않았다. 전 세계가 이처럼 정적의 품속에서 잠자고 있는 것이다. 당장에라도 떨어질 듯 무거워 보이는 구름이 밤하늘을 가려 별빛을 감추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곧 동이 틀 시간이었다. 나는 한때의 고요와 이상하리만치 고통스러운 숱한 상념에서 벗어나,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으로 머뭇거림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선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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