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뛰는 ‘현실’ 위에 나는 ‘디지털’ 범죄, 대학가를 뒤흔들다 (한성대신문, 544호)

    • 입력 2019-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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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19-10-14 16:20

지난 3월, 연예인 정준영 씨가 성관계 동영상을 불법 촬영해 유포한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 화제가 됐다. 하지만 이런 ‘디지털 성범죄’ 사건은 비단 남의 일만은 아니다. 실제로 대학가에서는 이런 범죄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만연하게 발생하고 있다. 작년 6월 고려대학교, 서강대 학교 등 총 5개의 대학에서 발생한 남자화장실 불법 촬영 사건부터, 올해 3월 실형을 선고받은 서울대학교 여자화장실 불법 촬영 사건까지. 끊임없이 발생하는 성범죄 사건들은 대학사회의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은밀하게 빨라지는 디지털 범죄

‘디지털 성범죄’란 디지털 기기를 사용해 사전 동의 없이 타인의 신체를 촬영하거나 촬영물을 유포하는 등의 불법 행위를 말한다. 즉, 디지털 매체를 통해 이뤄지는 성범죄란 뜻이다. 최근 디지털 성범죄는 각종 생활용품으로 둔갑한 디지털 카메라 등이 제작되면서 눈에 띄게 급증하고 있다. 또한 일단 영상물이 유포되면 전파 속도가 빠르고, 지우기도 쉽지 않다는 점 때문에 심각성 역시 날로 커지고 있다. 실제로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8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실적에 따르면, 지난해 4월 30일부터 12월 31일까지 8개월간 총 2,379명의 피해자가 디지털 성범죄를 신고했다. 피해 유형으로는 총 피해 건수 5,687건 중 유포 피해가 2,267건(39.9%)으로 가장 많았고, 불법 촬영이 1,699건(29.9%)으로 그 뒤를 이었다. 특히 불법 촬영 피해 1,699건 중 1,282건(75.5%)은 유포 피해와 함께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이효린(한국성폭력대응센터) 대표는 “디지털 성범죄는 본인이 범죄 대상이 됐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피해자가 지인을 통해서 피해 사실을 알게 되거나, 제3자가 미처 피해자 본인에게 알리지 못하고 대리 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가해는 가깝고 체포는 멀다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주목할만하다. 상기한 자료에 따르면, 불법 촬영자는 대부분 피해자와 ‘친밀한 관계’ 또는 ‘아는 사이’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전체 불법 촬영 1,699건 중 1,107건(65.2%)에 해당하는 수치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피해자는 가해자를 신뢰하고 안심하기 때문에, 본인이 불법으로 촬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것을 노린 범죄가 과반수를 훌쩍 넘는 것이다. 촬영물이 유포된 플랫폼이 어디인지에 따라서도 가해자를 찾는데 어려움이 있다. 유포된 곳이 해외에 서버를 뒀거나 해외 업체에서 운영하는 플랫폼이라면 국제수사공조를 통해서만 가해자를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조가 잘 이뤄지지 않는 경우에는 이마저도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이 대표는 “피해자는 본인의 모습이 담긴 촬영물을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점에서 경찰 신고조차 어려워한다. 또한 신고 후에도 수사가 잘 진행되지 않아 좌절하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법은 있어도 처벌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디지털 성범죄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저조한 처벌 실효성이다. 대법원이 발표한 ‘디지털 성범죄 처벌 현황’에 따르면, 최근 6년간 디지털 성범죄로 체포된 피의자 7,466명 중 징역형이나 금고형을 받은 경우는 단 647명(8.7%)에 불과했다. 현재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처벌 규정은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을 따르고 있다. 그중 제14조는 불법 촬영물을 판매·임대·제공 또는 전시·상영한 행위에 대해 처벌하도록 규정돼 있다. 하지만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과 피해 사례를 반영한 양형 기준은 따로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다. 구체적인 양형 기준이 없는 범죄는 재판부가 자의적 판결에 따라 형량을 결정한다. 대부분의 디지털 성범죄 건에서 구속과 실형이 선고된 경우가 드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에 김도우(경남대학교 경찰학과) 교수는 “다수의 디지털 성범죄 자가 불구속으로 수사되는 점으로 볼 때, 현행법으로는 재범 방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며 “법이 실질적인 사회안전망으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 이라고 말했다.

‘범죄’ 근절은 ‘소비’ 근절로 완성된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사람들의 가벼운 인식도 큰 문제다. 인터넷에 불법으로 유포되는 ‘사이버 음란물’을 소비하는 문화가 하나의 시장으로 형성되고 있다. 특히, SNS와 파일공유 사이트 등에서 판매 목적으로 불법 촬영물을 제작하고 유포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김 교수는 “불법 촬영물의 공급과 수요를 함께 차단해야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할 수 있다. 또한, 소비자 스스로 불법 촬영물을 시청하는 행위가 떳떳하지 못한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사후 대응보다 중요한 것은 사전 예방이다. 불법 촬영물을 소비하는 문화와 산업 구조가 존재하는 한, 디지털 성범죄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어지고 있는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다수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정수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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