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영속을 꿈꾼 ‘하나의 중국’, 대륙 위에 흩어진 갈등의 조각 (한성대신문, 548호)

    • 입력 2019-10-13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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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19-10-16 17:12

‘홍콩인이 중국 본토의 사법기관에 인계될 수 있다’는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는 홍콩 시민들의 시위, 이른바 ‘홍콩 사태’가 세 달 넘게 장기화되고 있다. 홍콩 시위대를 지지하는 국내 여론과는 달리, 중국 내부에서는 홍콩 경찰의 시위 진압을 지지하는 것과 함께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동의하는 여론이 일고 있다. 중화권 출신의 한국 연예인들 역시 같은 입장을 표명하는 등 본인의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 국내에서 더욱 화제가 됐다. 또한 이들은 특정 기업이 홍콩, 타이완을 중국과 별도로 표기했다는 이유로 보이콧을 선언하고 계약 해지를 통보하기도 했다. 도대체 중국인들에게 ‘하나의 중국’은 어떤 의미이기에 그들이 이렇게까지 분노하는 걸까?

혼돈의 대륙, 분열의 서막

‘하나의 중국’ 개념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국 영토를 다스리던 청 왕조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하기 힘들 정도로 부패한 상태였다. 동시에 이 시기 영국이 밀수출한 아편은 청나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는 여러 사회문제를 야기했고, 청나라는 수차례 아편 금지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영국은 아편 판매를 단행해, 결국 1840년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 ‘아편 전쟁’이 발발했다. 1·2차에 걸친 전쟁은 청나라의 패배로 끝이 났는데, 그 결과 양국은 ‘청나라는 영국에게 홍콩을 영구 할양(국가의 영토 일부를 타국에 이전하는 것)한다’는 조항이 포함된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청나라는 독일, 러시아 등과의 연이은 전쟁에서 패배했고, 일부 지역들은 99년간 조차(국가가 타국의 영토 일부를 빌려 일정 기간 통치하는 일)하는 형식으 로 점령당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홍콩 인근의 땅인 신계 지역의 조차를 요구했고, 추가 침략을 우려한 중국은 1898년에 ‘영국에게 신계 지역을 99년 간 조차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당시 청나라 내부에는 혼란이 일었다. 이에 국민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됐고, 전국적인 봉기를 피할 수 없었다. 결국 1911년, 민주주의 혁명인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멸망하고 국민당의 쑨원을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탄생 하게 됐다. 하지만 내부 정치세력의 분열, 쑨원의 죽음 등으로 국민들의 신뢰가 하락했다. 이홍규(동서대학교 동아시아학과) 교수는 “이때 등장한 공산당이 중화 민국의 어지러운 정세를 틈타 토지개혁을 시행해 농민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다”며 “세력이 급성장한 공산당이 국민들에게 대안 세력으로 인정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결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대립 구도를 형성해 내전이 발발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1949년, 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은 중국 영토를 장악한 뒤 ‘중화인민공화국’ 을 수립했으며, 국민당 세력은 현재의 타이완 지역으로 건너가 중화민국 정부를 재구축하게 된다.

같은 하늘 아래 두 개의 달

내전 직후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사이에 끊임없는 군사적 대립이 일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덩샤오핑은 중화민국과의 군사적 대립을 종결하기 위해 이들의 체제를 존중하는 통일 방안을 찾고자 했다. 그 방안으로 1979년에 ‘한 개의 국가에 서로 다른 두 개의 체제를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은 ‘일국양제(一國兩制)’가 제시됐다. 이후 덩샤오핑이 영국에 신계 지역 반환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이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하나의 중국’은 오직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만이 중국을 대표한다는 것으로, 그 외 타이완이나 홍콩, 마카오는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다시 말해 ‘중국은 분리 될 수 없는 하나의 나라이며, 분리 독립 등을 이유로 이 원칙을 깨려는 시도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영국의 지배하에서 신계 지역이 홍콩으로 흡수돼, 이 지역만 반환 될 경우 홍콩은 독립된 도시로서의 기능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를 우려한 영국은 1984년 12월에 신계 지역을 포함한 홍콩 전체를 중국에 양도하기로 하는 한편으로, 50년간 ‘일국양제’를 고수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덩샤오핑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전제 하에 홍콩이 반환된 지 50주년이 되는 2047년까지 홍콩에 자치적 행정권·사법권·입법권을 인정하는 자본주의를 보장하기로 약속했다. 이로써 타이완과 홍콩은 ‘하나의 중국’ 원칙 아래 ‘일국양제’ 체제를 따르게 됐다.

들불처럼 번진 민주화

이렇게 ‘하나의 중국’ 원칙과 ‘일국양제’ 체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주도 하에 자리를 잡아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90년대 리덩후이가 타이완의 총통으로 취임하면서 이것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리덩후이가 ‘중국과 타이완은 대등한 국가 대 국가의 관계’라는 ‘양국론’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중국’과 ‘타이완’ 사이의 갈등인 ‘양안 갈등’의 도화선이 됐다.

이들의 갈등은 2000년대에 천수이비엔 정부가 출범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천수이비엔은 타이완이 이미 독립된 국가라고 주장하며, 한 지역 한 나라를 의미 하는 ‘일변일국(一邊一國)’론을 주창했다. 즉, 중국과 타이완은 하나의 나라지만 타이완이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여전히 타이완이 중국의 지방정부에 불과하다며, 독립된 정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맞섰다. 결국 홍콩, 마카오와 마찬가지로 타이완의 주권도 중국에 귀속돼 있다는 것이다.

한편, 몇 년 새 빠른 속도로 성장한 중국이 타이완과의 경제 공동화를 추진하면서 양안 갈등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이에 대해 강준성(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 지역대학원 중국학과) 교수는 “중국과의 경제 공동화로 인해 불안감을 느낀 타이완 청년들이 2014년 ‘해바라기 혁명’ 등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어 나서고 있다” 고 설명했다.

한편, 중국과 홍콩은 9차례에 걸쳐 ‘경제긴밀화협정(CEPA)’ 체결을 통해 경제 협력의 범위를 확대해 왔다. 이에 따라, 홍콩 시민들 사이에서 중국의 정치적 간섭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후 홍콩에서는 2014년, 행정 장관의 직선제 선출을 요구하는 ‘우산혁명’을 시작으로 민주화 운동이 촉발됐다. 최근 진행된 시위 역시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즉, 중국이 성장하면서 ‘일국양제’를 명분으로 홍콩을 지배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시민들의 불안감이 시위로 이어진 것이다.

이 교수는 이같은 중국의 움직임에 대해 “근대에 발생했던 열강의 중국 침략과 그로 인한 중국의 분열, 세력 약화를 다시 겪지 말자는 민족주의적 공감대가 중국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 체제에 대한 중국의 권위주의적 입장이 철회되지 않는 이상 ‘일국양제’는 더욱 큰 저항에 봉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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