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성(性)> 체제와 이념, 그 발자국으로 남은 불평등의 역사 (한성대신문, 550호)

    • 입력 2019-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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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19-11-10 23:04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는 수많은 불평등이 존재한다. 현대에 접어들어 명시적 계급이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도래했다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은 사회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성(Gender)’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여러 불평등 중에서도 성 불평등은 유독 현대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성 불평등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이고,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났을까?

먼저 인류의 시작이었던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에는 생존을 위해 여성과 남성이 모두 경제활동에 참여했다. 남녀가 어떤 식으로 경제활동을 했느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지만, 당시 그로 인한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우리학교 김은경(창의교양교육과정) 교수는 이에 대해 “구석기 시대는 자연과 맹수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하고 안정적인 식량 확보가 중요했던 시기다. 따라서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형태에 따라 성차별이 발생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분석했다.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고 농경이 시작되면서 평등사회 내에서 집단의 통솔자와 신을 대신하는 사제가 등장했다. 발굴된 유물을 살펴보면 사제는 반드시 특정 성별만 독점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비중은 여성이 더 높았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부산 가덕도에서 출토된 조개팔찌를 한 여성의 인골이 있다. 조개팔찌는 신석기 사회에서 집단 내 통솔자나 사제가 착용했던 것으로, 인골의 주인이 집단 내 권위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생산성이 증가하는 청동기 시대에 들어 사회에 계급과 차별이 생겨나고, 이 과정에서 성 불평등이 발생했다. 성 불평등이 발생한 원인에는 다양한 설이 존재하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전쟁과 갈이농사(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농사)의 확대가 영향을 미쳤다는 가설이다. 기동력과 무력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남성의 사회적 가치가 높아지고 여성은 주변적 역할로 밀려났다는 것이다.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정치적 통솔권은 남성에게 집중된다. 정복전쟁을 통해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성립됐기 때문이다.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관등과 관직 역시 대부분 남성에게 돌아갔다. 신라는 삼국 중 유일하게 여왕이 존재했지만, 이는 왕이 될 수 있는 계급인 성골 중 남성이 없을 때만 가능했다. 기록을 보면 여성이 왕이 되는 것을 약점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대표적 사례가 ‘비담의 난’이다. 선덕여왕 말기, 비담은 ‘여자는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선전을 내걸며 반란을 정당화하려 했다. 이외에도 진성여왕의 오빠인 정강왕은 진성여왕을 후계자로 지목하며 ‘남성과 같은 골상’을 가졌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여성 그 자체로서는 왕이 될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경제활동과 재산 소유에 대해서는 성별에 따른 제약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을 보면, 주몽의 아내 소서노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할 당시 ‘가재(家財)를 기울여 국가의 일을 도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그녀가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고려시대에 들어 신화적 영역이 축소되고, 통치 이념으로 유교가 도입되면서 여성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 또한, 고려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불교에서도 여성이 사회활동을 하기보다는 가정 내에서 부덕을 발휘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대체로 남성이 왕과 관직을 독점했으며, 여성들은 삼국시대처럼 여왕이나 사제로 활동하기보다는 왕의 어머니 자격으로 섭정을 했다. 다만, 가정 내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아주 낮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의 혼인제도를 통해서도 이해 가능하다. 고려 후기 문신인 이곡이 원나라에 올린 공녀 폐지 상소문을 보면 “남자가 차라리 본가에서 따로 살지언정 여자는 집을 떠나지 않는 게 고려 풍속”이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처가살이가 흔했던 당시 고려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한편,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며 ‘신유학’이 새로운 풍속을 만드는 기틀로 등장한다.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삼강 (三綱)이라 불리는 ‘충‧효‧열’이 확립되는데, 이때 여성 규범도 강화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주론적으로 하늘에 해당하는 남성이 땅인 여성 위에 군림해야 하고, 여성은 남성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같은 기틀이 확립되며 조선시대 여성차별은 점점 심화됐다.

그렇지만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이 아예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같은 양반 여성들은 예술 활동을 하기도 했고, 19세기 순조 즉위 후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며 “조선시대 여성이 어떤 사회적 활동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은 큰 오해다. 양인 여성들의 경우 농사일이나 길쌈 등의 경제활동을 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정명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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